항목 ID | GC400063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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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樂齋先生日記 |
영어공식명칭 | Nakjae's Diary |
이칭/별칭 | 『낙재일기』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50년 - 『낙재선생일기』 저자 서사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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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592년~1595년 - 『낙재선생일기』 저술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15년 - 『낙재선생일기』 저자 서사원 사망 |
배경 지역 | 구암서원 -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
성격 | 일기 |
작가 | 서사원 |
[정의]
조선 후기의 대구 출신 의병장이자 학자인 서사원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기록한 일기문학.
[개설]
서사원(徐思遠)[1550~1615]의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자는 행보(行甫)이며, 호는 낙재(樂齋) 혹은 미락재(彌樂齋)이다. 경상북도 성주 팔거현(八莒縣)[현 대구광역시 북구 칠곡 일대]에서 출생하였다. 서사원의 본가는 대구 남산(南山)의 옛 역터이다. 서사원은 임진왜란기(壬辰倭亂期)를 중심으로 영남에서 구국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열악한 환경에서 학문 연마와 강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황(李滉)[1501~1570]의 학맥을 계승한 정구(鄭逑)[1543~1620]를 찾아가 배웠고, 정구는 서사원을 사우(師友)로 대우하였다. 장현광(張顯光)[1554~1637], 곽재겸(郭再謙)[1547~1615], 손처눌(孫處訥)[1553~1634] 등과 교유하였다. 서사원의 위패는 청주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봉안되었고, 2008년 대구광역시 북구에 있는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낙재집(樂齋集)』이 있다.
[구성]
『낙재선생일기(樂齋先生日記)』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임진년(壬辰年)과 계사년(癸巳年)의 일기가 월별, 날짜별로 기록된 부분이며, 둘째는 교지(敎旨), 격문(檄文), 관문(關文), 통문(通文), 교서(敎書), 상서(上書), 향병입약(鄕兵立約), 향병분정기(鄕兵分定記), 효유문(曉諭文), 진주수성절차(晉州守城節次), 초록문(抄錄文) 등 공문서(公文書)가 수록된 부분이며, 셋째는 갑오년(甲午年)과 을미년(乙未年)의 일기가 월별, 날짜별로 기록된 부분이다.
[내용]
『낙재선생일기』의 임진년 일기에는 전란 초기의 상황, 피난 생활의 견문, 의병을 일으킨 과정 등을 기록하였는데, 8월에 상주(喪主)가 된 이후에는 사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후 계사년에도 주로 날씨와 건강, 집안의 대소사에 대한 기록이 두드러진다. 갑오년과 을미년의 일기는 매우 소략하여 초록(抄錄)에 가깝다. 주로 식량 문제, 독서 및 강학 활동, 건강 상태, 교류한 인사, 치제(致祭) 등에 관한 기록이며, 청안현감(淸安縣監)에 제수(除授)되어 한양에 가서 임금에게 숙배(肅拜)하고 물러나서 청안현감에 부임하기까지의 기록은 날짜별로 비교적 자세하다.
[특징]
『낙재선생일기』는 유일한 필사본이다. 대부분 해서(楷書)로 정성을 들여 필사하였으나 간혹 행서(行書)로 쓴 경우도 있으며, 필체(筆體)로 보아 네다섯 명이 나누어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낙재선생일기’라는 책제(冊題)를 보면 서사원이 작성한 초고를 바탕으로 후일에 제자들이 분담하여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낙재선생일기』의 가치를 다섯 가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난중일기로서의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으며, 당시 대구 지역의 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2. 대구 지역의 의병 활동에 대한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3. 유학자가 난리에 대처하는 모습을 통하여 당시 사대부 문화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4. 기록문학으로서 일기문학의 특징을 두루 갖추고 있다.
5. 일기의 기록은 후일 서사원의 연보를 작성하는 데 기초적인 자료로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