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36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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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國- |
영어공식명칭 | Dongguk Group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노원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노광 |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노원동에 있었던 면방·섬유 중심의 기업 집단.
[개설]
6·25전쟁은 대구 섬유업계의 양적 팽창을 촉진하는 일대 전기가 되었다. 즉, 전시와 전후에 폭발적으로 증가한 의류 수요와 호경기는 직물 업계로의 신규 진입을 촉진하였고, 서문시장의 포목 상인들과 공장의 기술자들이 앞다투어 직물업에 진출하였다. 대구의 상업자본이 공업자본으로 전화한 것이다.
백욱기는 염료, 목판 행상으로 모은 돈으로 시민극장 맞은 편에 비단을 취급하는 백윤기상회를 마련하였다. 백욱기의 아명을 딴 백윤기상회는 “신용과 의리가 있는 상회”로 소문 나서 서문시장을 드나드는 전국 도매상들의 눈길을 끌었으며, 매출액은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942년 일제 말기 강제 기업 정리에 휘말려 점포를 정리하였다.
[변천]
백욱기는 1947년 5월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에 목제 직기 20대로 평화직물 공장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섬유가 잘 팔리지 않아 고전하였다. 1953년 다시 서문시장에서 평화상회를 개점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1953년에 대구광역시 북구 노원동1가에 직기 40대로 아주섬유 공장을 설립하였다. 수출 시장에 눈을 돌리면서 1965년 자본금 500만 원으로 동국무역을 설립하였다. 1970년대 염색 가공업에도 진출하여 비산 염색공단에 동국화섬을 세웠다. 1972년 동국직물 반야월공장을 건설하고, 1973년 자수 전문업체인 우일산업을 설립하였으며, 1974년에는 성서 협업단지를 조성하였다. 1976년 구미에 동국방직을 세워 면방에 진출하였다. 1983년에 외자(外資) 1700만 달러와 내자(內資) 150억 원을 투입하여 하루 생산량 30톤의 동국합섬을 설립하였다. 1977년 동국종합전자, 1978년 풍원산업, 1989년 동국소재, 1990년 동국창업투자를 연이어 설립하였다.
동국그룹은 1992년 단일 섬유업체로는 처음으로 수출 5억 달러를 기록하였으며, 섬유산업이 사양산업으로 몰릴 때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섬유산업은 영원하다”며 섬유인으로서 자긍심을 잃지 않았다. 동국무역 그룹은 국내 대기업 중 가족경영 체제를 유지하는 대표적 기업 중 하나였다. 1995년 그룹 체질 강화와 사업다각화를 위하여 대규모 그룹 인사를 통하여 전문경영인 체제를 강화하였다. 섬유의 매출 비중이 90%로 지나치게 높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금융시장 불안으로 대구 지역 중견기업이 연쇄 부도가 나는 가운데 1999년 10월 제일은행 등이 동국무역과 동국방직을 워크아웃 대상 기업으로 선정하였다. 동국그룹은 한때 30대 재벌에 진입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2008년 삼라그룹 컨소시움에 매각되었다.
[의의와 평가]
동국그룹 백욱기 회장은 교육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1979년 동국장학재단을 만들어 장학금을 지급하였으며, 동국실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불우 학생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주었다. 1990년에는 헌암의료재단을 설립하여 공단 근로자와 가족을 위한 의료지원 활동을 펴는 등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대구경북 연사직물 생산협력협회[1985년]와 대구경북 섬유산업협회[1993년]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대구상공회의소 부회장, 대구섬유기술진흥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동국그룹 백욱기 회장은 대구의 서문시장에서 포목상으로 상업자본을 축적하여 산업 자본화하는 데 성공한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가 중 한 사람이며 한국 섬유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