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2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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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命普 |
영어공식명칭 | Seo Myungbo |
이칭/별칭 | 화극(華極),북곽(北郭)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욱 |
출생 시기/일시 | 1704년 11월 29일 - 서명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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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78년 3월 14일 - 서명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79년 9월 - 증직 |
추모 시기/일시 | 1841년 2월 - 정려 |
출생지 | 산격동 -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
거주|이주지 | 산격동 -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
묘소|단소 | 서명보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 555 |
사당|배향지 | 효자 증 병조좌랑 달성서명보지려 -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 31-13[산격동 878-34]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달성(達城)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출신의 효자.
[가계]
서명보(徐命普)[1704~1778]의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자는 화극(華極), 호는 북곽(北郭)이다. 아버지는 서익지(徐翊祉)이고, 어머니는 오산김씨(鰲山金氏)이다. 의병장 서사진(徐思進)의 5대손이다.
[활동 사항]
서명보는 1704년(숙종 30) 11월 29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서 태어났다. 1738년(영조 14)에 아버지가 중풍에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서명보는 실력 있는 의원과 좋은 약재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먼 곳이라도 몸소 찾아가서 아버지의 병세에 대해 상담하고 약을 구하여 왔으며, 약은 직접 달여서 먼저 맛을 본 후에 올렸다. 20여 년 동안 사용한 약재가 수백 제(劑)[한 제는 탕약(湯藥) 스무 첩 또는 그만한 분량]가 넘었는데 모두 관청의 약국에서 조제하였다. 약값은 기한 내에 치렀으며 독촉을 받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서명보는 집안이 가난하여 손수 물고기를 잡고 땔나무를 하였으며, 아내는 베를 짜서 시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아버지가 임종이 가까워 위독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여 하루를 더 살게 하였다. 1761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장례를 치른 후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1778년(정조 2) 3월 14일 사망하였다. 서명보의 저술로는 『북곽실기(北郭實紀)』가 있다. 아버지를 간호하며 「시탕일기(侍湯日記)」와 「거려일기(居廬日記)」를 남겼다.
[묘소]
서명보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 555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서명보는 1799년 통훈대부 공조좌랑에 추증되었으며, 1841년(헌종 7)에는 정려(旌閭)를 받았다. 서명보의 효자 정려인 ‘효자 증 병조좌랑 달성서명보지려(孝子 贈 兵曹佐郎 達城徐命普之閭)’는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 31-13[산격동 878-34]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