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0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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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判官 徐侯有喬 永世不忘碑 |
영어공식명칭 | Pangwan Seohuyugyo Yeongsebulmangbi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팔달동 524-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욱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791년 - 서유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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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851년 10월 - 판관 서후유교 영세불망비 건립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859년 - 서유교 사망 |
이전 시기/일시 | 2015년 - 판관 서후유교 영세불망비 대구광역시 북구 팔달동 들머리에서 대구광역시 북구 팔달동 524-4로 이전 |
현 소재지 | 판관 서후유교 영세불망비 - 대구광역시 북구 팔달동 524-4 |
원소재지 | 팔달교 들머리 부근 - 대구광역시 북구 팔달동 |
성격 | 불망비 |
양식 | 대석|비신 |
관련 인물 | 서유교 |
재질 | 석재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18㎝[비신 높이]|48㎝[비신 너비]|14㎝[비신 두께] |
관리자 | 대구광역시 북구청 |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팔달동에 있는 조선 후기 대구판관 서유교를 기리는 불망비.
[개설]
판관 서후유교 영세불망비(判官 徐侯有喬 永世不忘碑)는 조선 후기 대구판관으로 재임하였던 서유교(徐有喬)[1791~1859]의 치적을 기리고자 건립한 비석이다. 서유교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며, 1792년(정조 16)에 서른여덟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849년(헌종 15)에 대구판관으로 부임하여 와서 1851년(철종 2)까지 약 2년간 재임하였다.
[건립 경위]
서유교는 대구판관으로 부임하여 당시 대구 지역의 관문 구실을 하던 대노원(大櫓院) 앞 팔달진(八達津)[지금의 팔달교 부근]에 돌다리를 놓아, 이전에는 배로 건너야 하였던 팔달진을 걸어서 건널 수 있게 하였는데, 일설에 따르면 2년간 판관으로 재임하면서 받은 봉급을 모아 사재로 돌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당시 대구부 서중면(西中面)[대구광역시 북구의 노원동·노곡동, 서구의 원대동·비산동·평리동 일대]의 면민들은 서유교의 치적을 기리고자 판관 서후유교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위치]
판관 서후유교 영세불망비는 대구광역시 북구 팔달동의 팔달교 들머리 일원에 세워졌으나, 2015년 대구광역시 북구 팔달동 524-4로 이전하였고 그때 비각을 새로 건립하였다.
[형태]
판관 서후유교 영세불망비는 대석(臺石), 비신(碑身)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은 높이 118㎝, 너비 48㎝, 두께 14㎝ 규모이다.
[금석문]
판관 서후유교 영세불망비에는 ‘판관서후유교영세불망비(判官徐侯有喬永世不忘碑)’라는 비제가 적혀 있고, 서유교의 치적을 칭송하는 글을 한자로 기록하고 있다.
“무성한 저 달성, 이곳은 공의 본향이라./ 구계 선생[서침(徐沈)]의 법을 본받고, 약봉 선생[서성(徐渻)]의 꽃다움을 이었네./ 향리들이 이로움에 감복하고, 향민이 은혜로 강 건넘을 칭송하네./ 마음과 눈에 남아 있으며, 옛날 걸어 건너던 곳에 다리를 놓으셨네.// 신해년[1851년] 10월 일 서중면 세움[鬱彼達城 寔公本鄕/ 遵龜老規 襲藥翁芳/ 吏服利器 民頌慈航/ 目存心思 古步有梁// 辛亥 十月 日 西中面 立].”
[현황]
판관 서후유교 영세불망비는 대구광역시 북구청에서 비각을 건립하여 보존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판관 서후유교 영세불망비는 대구판관 서유교의 치적을 기리고자 건립한 것이다. 선정을 베푼 관리의 치적을 기록하고 칭송하는 것을 통하여 후세에 교훈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