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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2015
한자 弘法國師
영어의미역 Leader of the Nation Hongbeob
이칭/별칭 홍법(弘法)
분야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이성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승려
출신지 미상
성별
본관 미상
대표관직 국사

[정의]

고려 전기 충청북도 충주에서 활동한 승려.

[활동사항]

홍법국사의 생전 활동 모습에 관해서는 어디에서도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비(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碑)가 전해지고 있어 비문의 내용을 통해 부분적이지만 그 생애의 일부를 어느 정도 확인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비문마저도 마멸이 심하여 전문의 정확한 판독은 불가능한 상태이며 판독이 가능한 부분만을 토대로 출생 연도를 추정해보면 대략 통일신라 말 신덕왕대인 912년에서 916년 사이인 것으로 보인다.

출가 시기의 경우 탑비에 ‘일기의 성상’을 지나 출가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12세에 출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출가한 해가 언제인지는 탑비의 마멸로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930년(태조 13)에 수계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활동하던 무렵에 보통 승려들이 출가에서 수계하기까지 걸리는 년 수가 3~6년이었던 것과 대조해 볼 때 그의 출가 시기도 대략 921~927년(태조 4~10)사이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홍법국사가 출가한 사원에 대해서도 현재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신라 후기부터 고려 초기까지 활동했던 고승들의 출가 사원에 관한 자료를 분석해 보면, 대체로 개경 지역보다는 출신지와 서로 인접한 지역의 사원으로 출가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홍법국사의 출가 사원도 그의 출생 연고지와 가까운 인근 지역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고려 태조는 관단사원을 설치하여 구족계의 수계를 국가 차원에서 관장하였는데, 이에 대한 첫 번째 사례가 홍법국사의 경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탑비에 홍법국사가 930년(태조 13)에 마가갑사(摩訶岬寺) 계단(戒壇)에서 수계하였음을 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가갑사는 오관산(五冠山)에 소재한 사찰이었고 오관산은 개경의 진산이었다. 이처럼 개경의 진산에 문을 연 사찰이라면 태조에 의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사찰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문에 의하면 홍법국사가 “화양(華壤)에 가서 유학할 것을 결심하고, 입조사(入朝使)인 시랑 현신(玄信)의 배에 편승하여 아무런 사고 없이 운도(雲濤)를 헤치면서 바다를 건넜다”라고 적혀 있는 바와 같이 입조사인 현신 일행의 배를 얻어 타고 중국으로 유학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홍법국사가 유학길에 오른 것은 구족계를 받은 930년(태조 13)으로부터 5년 정도가 지난 935년경이었으며 절강 지방으로부터 시작한 구도 여행이 복건성 지방으로 계속 이어졌음을 비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귀국 후 홍법국사는 개경의 보제사와 봉은사 등의 사찰에서 홍법 전도에 전념하였다. 홍법국사가 국사에 추정될 때 승계는 대선사였다. 대선사는 선종 승려의 최고 직위였으며 홍법국사가 대선사가 된 것은 성종 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 중세상(中世上)에 수록된 판독문에 “강궐□은□문조첩 성종문의대왕지천선사 목종의양대왕(絳闕□恩□門稠疊成宗文懿大王知天禪師 穆宗宣讓大王”라 소개되었으나, 『한국금석문대계(韓國金石文大系)』에 소개된 판독문에는 “강궐□은□□칭□ 성종문의대왕가대선사 목종의양대왕 絳闕□恩□□稱□ 成宗文懿大王加大禪師 穆宗宣讓大王”이라 하여 ‘지천(知天)’을 ‘가대(加大)’로 판독하고 있다. 문맥상으로 ‘지천선사’라는 부자연스러운 해석보다는 성종문의대왕이 대선사를 더하여 주었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고 타당할 것으로 보여 지기 때문이다.

홍법국사봉은사에서 활동했던 시기도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목종 때 국사에 책봉된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비문에 결락이 심하여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휘호(徽號)를 □□국사(□□國師)”라 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현재 해독이 가능한 부분만으로도 성종목종 대에 고승으로 우대되었음이 확실하고, 특히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문헌 기록이나 금석문 기록 어디에도 성종목종 대에는 국사나 왕사의 책봉을 전해주는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이후 홍법국사정토사를 하산소로 삼아 만년을 보내다가 목종 때 가부좌를 맺고 앉은 채 입적하였다고 전해진다.

[학문과 사상]

홍법국사는 중국에 유학하여 여러 선지식을 두루 섭렵하였다. 비문에 “삼라만상이 모두 파초와 같이 허무하다는 제행무상의 법문을 억념하여 법성(法性)이 모두 공(空)한 이치를 깨닫고 색신(色身)은 마치 환몽과 같음을 관하였으니, 도를 배움에 있어서 어찌 고정된 스승이 있겠는가!”라 전하고 있듯이 스승을 찾아 구도의 여행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회상을 차리고 학인을 지도하니, 누구나 법(法)을 물으면 빠짐없이 대답하였음은 흡사 대상에 놓여 있는 거울이 만상을 비추되 피로를 잊음과 같아서 어두운 곳을 비추지 않는 데가 없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학문적 성취가 일취월장하여 큰 발전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육조에 이르러 크게 사선을 연창하여 대대로 이를 상전하며, 진리의 등불이 꺼지지 않고 상속하였다. 모든 제자들이 스님의 법수에 젖었다”라 한 바와 같이 선사상을 계승 발전시켜 모든 제자들이 스님의 법수에 빠져들 만한 경지에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상훈과 추모]

비문에 “선왕인 목종께서 부음을 듣고 진도하셨다”라 한 바와 같이 목종 재위 기간인 997년 10월~1009년 2월까지 중 어느 해일 것이나 자세한 날짜는 알 수가 없다. 목종은 국서로 조의를 표함과 더불어 물품을 보내 부의하였으며 부처님께 정공을 올려 현복이 되게 하는 한편, 특히 역명(易名)의 옛 의전을 받들어 장차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휘유를 전하여 시호를 홍법(弘法)이라 하고 탑명(塔銘)을 실상(實相)이라 하였다.

아울러 예부상서로 당대의 명필이었던 손몽주로 하여금 비문을 짓게 하여 1017년(현종 8)에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과 탑비가 완성되었다.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과 탑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유지(遺址)는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하실에 있으며 마을 북쪽에 위치한 옥녀봉[710.5m] 남쪽 끝자락에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비지가 위치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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