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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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陶窯址 |
영어의미역 | Kiln Site |
이칭/별칭 | 가마터,자기소,도기소,사기장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길경택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토기나 자기를 굽던 가마터.
[개설]
일반적으로 토기나 자기, 기와를 굽거나 숯을 만들고 철을 녹이던 시설을 통칭하여 가마[窯址]라고 한다. 도요지는 그 가운데 토기나 자기를 굽던 가마에 한정한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연질 토기는 노천요(露天窯)라고 하는 원시 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노천요는 연료실과 적재실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를 지나면서 경질 토기의 제작 기술이 발달하고, 가마의 구조도 높은 열을 낼 수 있는 밀폐형 가마[室窯]로 발전하였다. 삼국시대 이후 밀폐형 가마는 다양한 모양으로 발전했으며, 구우려는 도자기의 종류에 따라 불과 열기를 조정할 수 있도록 변하였다.
[현황]
충주에서 발굴 조사 또는 지표 조사로 보고된 가마터는 야철 유적을 제외하고 8개면에 걸쳐 43곳이 있다. 기와가마터 1곳, 토기와 옹기가마터 6곳, 숯가마터 3곳이며, 나머지는 대부분 분청사기가마터와 철화백자가마터를 포함한 백자가마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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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의 가마터
43곳의 가마터 가운데 발굴 조사된 가마터는 6곳이다. 충주 미륵리 요지와 충주 문주리 요지는 발굴 조사된 후 각각 충청북도 기념물 제100호, 충청북도 기념물 제81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중앙탑면 하구암리 사기점골 백자가마터는 중부내륙고속도로 문화 유적 발굴 조사 때 정리되어 사라졌으며, 이류 수주토기가마터도 유구가 불명확하여 시굴 조사 후 파괴된 유구만을 확인했을 뿐으로 현재는 훼손되고 없다. 중부내륙고속도로 문화 유적 발굴 조사의 일환으로 발굴 조사된 중앙탑면 뒷골 유적에서는 5기의 백탄요(白炭窯)와 2기의 흑탄요(黑炭窯)가 확인되었으며, 큰골 유적에서는 백탄요 3기, 흑탄요 5기, 제련로 2기, 단야로 1기가 확인되었다.
나머지 37곳의 가마터는 아직 발굴 조사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 37곳 가운데 숯가마 1곳을 제외하면 36곳이 도요지이다. 토기(옹기)가마터가 5곳, 분청사기가마터와 백자가마터가 31곳이다. 현재 충주에서 확인된 도요지는 발굴 조사된 충주 미륵리 요지·하구암리 사기점골 백자가마터·이류 수주토기가마터까지 합하면 39곳이다. 물론 지표 조사를 더욱 정밀하게 한다면 훨씬 많은 유적이 확인될 것이다.
충주의 도요지 가운데 토기가마터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해당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자기가마터는 모두 조선시대 분청사기가마터나 백자가마터이다. 이는 물론 조사가 미흡하여 생긴 결과겠으나 고려청자를 굽던 가마터가 확인되지 않는 점이 특이하다.
도요지 가운데 가장 주목을 크는 것은 노은면 연하리에 있는 분청사기·백자가마터들이다. 이 가마터들은 많은 수가 잘 남아 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충주목조에 하품(下品) 자기소가 있던 곳을 보련동(寶蓮洞)이라고 한 기록과 일치한다. 또 앙성면 일대 모점저수지 부근에 집중되어 있는 백자가마터도 주목된다.
현재까지 조사된 결과에 따르면, 충주의 도요지는 시기적으로 토기가마터는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해당하나, 자기가마터는 조선시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연하리 일대의 도요지는 조선 초기가 위주이며, 하늘재를 포함한 미륵리 일대와 앙성면 모점리 일대의 도요지는 조선 후기가 중심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