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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원 옥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519
한자 沈器遠獄事
영어의미역 Prison of Sim Giw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역모 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1644년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644년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서울특별시
관련인물/단체 이일원|권억|회은군|소현세자|김자점|김류|임경업|이시백|채문형|황헌

[정의]

1644년(인조 22) 청주 출신 점쟁이 채문형이 심기원을 선동하여 회은군 이덕인을 추대하려다가 죽음을 당한 사건.

[역사적 배경]

병자호란 이후 김자점(金自點)·김류(金瑬) 세력과 이귀(李貴)·이서(李曙) 계열 세력의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 반청 의식이 강했던 재야의 사류들은 이귀 세력을 지지하였고, 상대적으로 지지 기반이 약했던 김자점 등은 친청 세력과 결탁하여 적대 세력의 제거를 통한 권력의 공고화를 노렸다. 이런 상황에서 심기원(沈器遠)이 적극적으로 반청을 주장하고 나섰다.

[경과]

심기원은 좌의정으로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하게 되자, 이때 충주 출신 점쟁이 채문형이 심기원을 선동하여 이를 기화로 심복 장사들을 호위대(扈衛隊)에 두고, 지사를 지낸 이일원(李一元), 광주부윤 권억 등과 함께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추대할 목적으로 모반을 꾀하게 하였다. 그러나 1644년 3월 심기원의 부하 황헌이 변심하여 “수어사 심기원이 결계군관 70여 인을 중심으로 수어청 아병까지 동원하여 말로만 반청을 내세우는 청류 50여 인을 타도하고 인조를 폐위시킨 다음 회은군 덕인을 추대하여 무사배가 정권을 잡아 대청 항쟁을 벌이려고 하였다”라고 밀고하였다.

심기원 일당의 국문이 진행되면서 김자점 등은 이 사건을 반청 세력을 제거하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심기원의 심복 권억은 “인조 폐위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일시 귀국했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수행했던 청나라 장수를 살해하여 명나라에 보냄으로써 조선의 반청 자세를 알리고, 동시에 청을 협공하자고 제의하여 지지부진한 반청 자세를 적극화하려는 목적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대외 자세의 쇄신을 더욱 선명히 하기 위해 인조를 상왕으로 받들고 회은군 이덕인을 추대하려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초(供招)는 김자점 일파에 의해 왕의 폐위를 꾀했다는 것으로 조작되고, 심기원을 비롯한 주모자의 처형이 서둘러 이루어졌다. 아울러 심기원과 친분이 있던 이시백(李時白) 형제가 곤욕을 치렀고, 임경업(林慶業)도 역모와 관련된 것으로 의심을 받아 소환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이때 채문형은 심기원을 선동하여 역모를 꾸미게 한 인물로 처형되었다.

[결과]

심기원과 권억 등 주모자는 처형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인조의 의심을 받던 소현세자는 1645년 병을 얻어 급사하였으며, 세자빈 강빈마저 죽음을 당하였다. 일설에는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사건은 또한 친청 세력인 김자점 등이 인조 말년에 정권을 장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역모를 꾸미도록 심기원을 선동했던 채문형이 살던 충주목은 1644년 4월 4일 충원현으로 강등되었고, 충청도는 공청도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병자호란 이후 공신 내부의 알력이 친청과 반청의 형태로 드러나면서, 물리력을 동원하여 친청 세력을 제거하려던 반청 세력의 의도가 좌절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인조 말년 친청 세력인 김자점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봉림대군(鳳林大君)[훗날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효종이 반청과 북벌을 명확히 함으로써 친청 세력이었던 김자점 일파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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