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0351
한자 孫秉熙
영어음역 Son Byeonghui
이칭/별칭 이상헌(李祥憲)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박걸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별
생년 1861년연표보기
몰년 1922년연표보기
본관 밀양
초명 응구(應九)
의암(義菴)
출신지 충청북도 청주
상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년]

[정의]

민족대표의 수장으로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천도교 교주.

[활동사항]

1897년 해월 최시형(崔時亨)의 뒤를 이어 동학의 제3대 교주가 된 그는 동학의 재건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교세의 재건에 힘쓰는 한편, 국내의 인재들을 일본으로 유학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교도들을 지휘하여 갑진개화운동(甲辰開化運動)이라는 신생활운동을 주도하였다. 1905년 12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이듬해 1월에 귀국, 이용구 등 천도교단내 친일파를 제거하고 교세의 확장에 노력하였으며, 교육사업과 언론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국제정세의 변화를 예의 주시하던 그는 독립운동의 기운이 무르익었다고 판단하고 1919년 1월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 등 3대원칙을 세우고 기독교계와 불교계와 연합, 민족대연합전선을 구축하고 3·1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이른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에서도 수장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하고 3월 1일 태화관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을 주도하고 일제에 피체되었다. 그는 옥중과 법정에서도 일본인 검사나 판사에 대하여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의연하게 투쟁하였다. 그러나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병세가 악화되어 보석으로 출옥하여 요양 중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학문과 사상]

아전의 서자로 태어난 그는 봉건적 구습의 악폐를 체험하며 평등사상과 인내천사상을 지니게 되었고, 1882년 동학에 입교하여 구도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가 동학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은 동학교도의 보은 장내리 집회와 동학혁명을 주도하면서부터이다.

[묘소]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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