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8세에 동학교도가 되고,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 때 손병희(孫秉熙)[1861~1922]와 함께 6만 여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하여 진압당한 후 전국 각처를 방랑하였다. 1908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전제관장(典制觀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만세운동을...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방의 항일투쟁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일찍이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4년에 청주에 청남학교(淸南學校)를 설립하고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안희제(安熙濟)·김동삼(金東三)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후 상해...
아우내 장터의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독립운동가. 충청북도 청원군 출신으로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의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趙仁元)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 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시위군중이 태극...
민족대표의 수장으로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천도교 교주. 1897년 해월 최시형(崔時亨)의 뒤를 이어 동학의 제3대 교주가 된 그는 동학의 재건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교세의 재건에 힘쓰는 한편, 국내의 인재들을 일본으로 유학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교도들을 지휘하여 갑진개화운동(甲辰開化運動)이라는 신생활운동을...
구한말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1905년~1910년 사이에 개화자강파(開化自强派)가 전개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 한말의 애국계몽운동은 의병운동과 더불어 국권수호운동의 주요한 두 흐름 중 하나이다. 애국계몽운동은 갑신정변과 독립협회 운동으로 대표되는 개화자강 계열의 민족운동을 이은 것이었다.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개화자강 계열의 새 지식인들은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
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순국한 독립운동가. 1919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날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한봉수(韓鳳洙)[1883~1972]로부터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부탁받았다. 이에 그는 동지들과 상의하여 3월 30일 미원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정하고, 인근지역 주민들에게 참가를 종용하는 등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