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1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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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烈女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집필자 | 김선명 |
[정의]
전통 시대 목숨으로 정조를 지켰거나 남편을 위해 지극정성을 다한 천안 지역의 부녀자.
[개설]
열녀(烈女)란 어려움을 당하여 목숨으로 정조를 지켰거나 오랜 세월에 걸쳐 고난과 싸우며 수절한 부녀자로, 일반적으로 열녀와 열부(烈婦)를 통칭한다. 천안 지역의 열녀에 관한 기록은 『대록지(大麓誌)』, 『직산현지(稷山縣誌)』, 『영성지(寧城誌)』, 『대록삼강실록(大麓三綱實錄)』, 『여지도서(輿地圖書)』, 『조선환여승람(朝鮮環輿勝覽)』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유형]
열녀의 유형에는 남편이 죽자 자결하는 자진(自盡) 유형과, 남편이 죽은 후 수절하며 시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잘 키워 집안을 지탱하는 수절(守節) 유형이 있다. 천안 지역은 예로부터 충효의 고장으로, 수많은 열녀가 있어 일일이 다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1. 자진(自盡) 유형
황성현(黃成鉉)의 아내 이씨(李氏)는 금성 대군(錦城大君)의 후손이다. 20세에 남편이 죽자 염구와 장례 준비를 손수 해 놓고 시부모에게는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장례식 전 자결하였다. 현감 최홍보(崔弘輔)가 열녀전을 짓고 감사 이덕중(李德重)이 행장(行狀)을 지어 올려 1746년에 영조가 정려(旌閭)를 내렸다.
정침(鄭琛)의 아내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주부 김위(金暐)의 딸이며 석교리에 살았다. 병자호란 때 청병에게 끌려가던 중 물 마시기를 청하여 잠시 놓아주자 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나라에서 이 소식을 듣고 정려를 내렸다.
가선대부(嘉善大夫) 권예겸(權禮謙)의 딸 권씨(權氏)는 연기의 문주리로 시집을 갔고, 남편이 물에 빠져 죽자 같이 빠져 죽었다. 시체를 건져 보니 권씨가 남편의 시체를 껴안고 죽어 있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나라에서는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주었다.
윤하주(尹廈住)의 아내 진주 유씨(晉州柳氏)는 남편이 죽자 삼년상을 치른 뒤 시부모에게 옷을 지어 드리고 자결하였다. 유서에 남긴 뜻에 따라 남편과 한곳에 장사를 지냈다.
이재준(李載峻)의 아내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안재성(安在晟)의 딸이고 남화리에 살았다. 영조 때 남편이 전염병으로 죽자 장사를 치른 뒤 마을 앞의 강에 나가 몸을 던져 자결하니 여종도 따라 죽었다. 열녀(烈女)와 충비(忠婢)의 정문(旌門)을 세워 주었다
이조 참판을 지낸 김광열(金光烈)의 아내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현감 성효온(成孝溫)의 딸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남편을 죽이려 하자 자신의 몸으로 가로막다가 남편이 죽자 따라 죽었으며, 아들 김철명도 같이 죽었다. 나라에서 창녕 성씨와 아들에게 정려를 내렸으며, 자세한 내용은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도 기재되어 있다.
최희식(崔希湜)의 아내 강릉 김씨(江陵金氏)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병사들에게 붙잡혔으나 죽음을 결심하고 절개를 지키다가 구타를 당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청나라 병사들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여 버리고 간 뒤에 다시 살아났으나, 이로 인하여 병을 얻어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김의연(金義淵)의 아내 고성 이씨(固城李氏)는 참판 이준신(李俊藎)의 증손녀이다. 시어머니의 병세가 위독하자 남편이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하는 일을 보고 놀랍고 애통하여 어찌할 줄 몰랐으며, 남편의 손가락 창병이 심해져서 곡기를 끓고 정신이 나날이 쇠약해지자 함께 음식을 끊고 먹지 않다가 남편보다 먼저 숨을 거두었다. 예조에서 정문을 세워줄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정택진(鄭宅鎭)의 아내 청주 곽씨(淸州郭氏)는 곽시징(郭始徵)의 고손녀이다. 남편이 죽자 따라서 죽으려 하였으나, 시부모가 간절하게 타이르고 위로하니 억지로 따랐으며 정성을 다하여 시부모를 섬겼다. 남편이 죽은 지 9년 뒤에 시동생이 결혼을 하자 곽씨는 친정에 가서 어머니를 뵙고 돌아와 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 수절(守節) 유형
윤천대(尹千大)의 아내 박씨(朴氏)는 남편이 종창을 앓아 병세가 심해져 임종에 이르자 왼쪽 다리의 살을 베어 내어 먹여 3일을 더 연명케 하였다. 고을에서 여러 차례 충청도 감영에 서계를 올려 관에서 쌀과 고기를 내려 주었다.
이기은(李基殷)의 아내 권씨(權氏)는 남편이 죽으면서 남긴 부탁 때문에 차마 순절하지 못하였다. 홀로 남아 시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였으며, 정성을 다해 아들을 길렀다.
이제덕(李濟德)의 아내 문화 유씨(文化權氏)는 열세 살에 시집을 와서 시아버지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남편의 병이 위중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고, 남편이 죽자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뱃속의 태아를 생각하라며 울며 만류하는 시아버지 때문에 죽지 못하고 시아버지 봉양과 어린아이 양육에 정성을 다하였다.
이치신(李致新)의 아내 창원 유씨(昌原愈氏)는 정랑을 지낸 효자 유언겸(愈彦謙)의 9세손이다. 남편이 죽자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늙은 시어머니가 통곡하면서 간곡하게 만류하여 차마 죽지 못하고 아비 잃은 어린 아들을 가엽게 여겼다. 시어머니가 병들어 병환이 깊어지자 음식을 잘 먹지 못하였는데, 하루는 시어머니가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자 구할 길이 없어 지극정성으로 하늘에 기도하니 갑자기 꿩이 집 안으로 날아들었다. 손가락을 잘라 시어머니의 입에 피를 흘려 넣어 4일을 더 살게 하였다.
[관련 유적]
관련 유적으로는 정려와 비가 있다.
정려는 풍세면 가송리의 장한(張漢) 처 열녀 완산 이씨(完山李氏)의 정려, 병천면 도원리의 김광열(金光烈) 처 창녕 성씨(昌寧成氏)가 포함된 정려, 성남면 석곡리의 이규호(李圭祜) 처 경주 김씨(慶州金氏)가 포함된 정려, 입장면 용정리의 최구현(崔九鉉) 처 전주 이씨(全州李氏)와 최이곤(崔以昆) 처 평산 신씨(平山申氏)가 포함된 최씨의 정려, 오선남(吳善南) 처 경주 김씨(慶州金氏)가 포함된 오씨의 정려 등이 있다.
비는 목천면 교천리의 열녀 청주 한씨(淸州韓氏) 비, 북면 사담리의 유춘연(柳春連) 처 풍양 조씨(豊讓趙氏) 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