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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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이칭/별칭 | 조일 전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충청남도 천안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벌어진 전쟁.
[개설]
1591년 일본 전국을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 침공을 계획하고 1592년 수륙 양군을 편성하여 부산포를 통해 조선을 침략하였다. 부산과 김해를 통해 총 20만 명에 이르는 대군이 조선 땅에 이르렀다. 조선은 주요 군관을 임명하여 대비토록 하였으나 충주 전투에서 신립의 전군이 몰살되었다. 일본군의 북상 소식에 선조(宣祖)는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하며 천도를 결정하였다.
일본군의 북진을 저지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의병 부대와 남해에서 제해권을 잡은 수군이었다.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은 향토 지리에 익숙하여 적은 병력으로 유격 전술을 활용해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개전 초기에는 수군도 패전을 거듭하였으나, 이순신의 지휘 아래 연전연승하며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였다.
한편 명나라에서 구원병이 파견되었고 조명 연합군과 각 지역의 관군이 전과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삼대첩(三大捷)으로 손꼽히는 권율과 의승장 처영 등의 행주 대첩과 김시민의 진주성 대첩,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은 모두 대승을 거둔 전투였다.
명나라의 심유경은 일본과 협상을 계획했지만 화의는 결렬되었고,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되었다. 정유재란 중 남하한 명군과 북상중인 일본군이 마주친 곳이 직산이었고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져 명군이 승리함에 따라 일본군은 북진을 포기하였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가 사망함에 따라 일본 군대는 급히 철수하기 시작했고, 남해 노량에서 이순신의 수군이 퇴각하는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며 7년 전쟁은 막을 내렸다.
[역사적 배경]
조선 선조 시기는 정치적으로 훈구와 사림간의 정쟁이 계속되었고, 국방 체제는 붕괴되어 유명무실하였으며, 국가 재정 역시 매우 허약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벌어져 정계는 온통 이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고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의 보고가 엇갈리자 국가 방비에 대한 노력을 접기까지 하였다.
일본은 15세기 후반 유럽 상인들이 들어와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戰國時代)를 통일,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고 있었다. 도요토미는 국내의 안전을 위해 제후의 무력을 방출하는 방침으로 대륙 침략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과의 외교에 문제가 생기자 조선에 머무르던 일본인을 모두 소환하고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에 전력하였기 시작하였다.
[경과]
1592년 4월 13일에 침략군을 실은 700여 척의 병선이 오전 9시경에 대마도를 출항하여 오후 5시경에 부산포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부산포에서 경상좌수영군을 궤멸시키고, 다음날 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으며 다음날에는 동래부를 침공해 군민을 몰살시켰다. 이후 양산·밀양을 거쳐 대구·선산을 통과하여 상주에 이르렀다.
후속 부대가 계속 상륙하여 1592년 5월에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은 수군 9천을 합하여 총 20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세 길로 나누어 북상하기 시작하였고 곧 경상도의 여러 고을이 함락되었다. 게다가 순변사 이일의 상주 전투 및 신립의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모두 조선군이 패하며 왜군은 급속히 북상하였고 조정에서는 천도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직후 전국 각지에서는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토가 왜군에게 유린당하자 향토를 스스로 지키기 위함이었다. 의병을 이끄는 의병장은 유교적 충의 정신을 함양한 선비 계층이었다. 전국의 의병은 1593년(선조 26)에 관군의 25% 정도인 2만 3000여 명이 있었고, 이들은 후에 조선 관군으로 통합되기도 하였다.
의병의 활약과 함께 남해 상에서는 이순신의 수군이 제해권을 잡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의 지휘 아래 1592년(선조 25)에 4회 출동하여 연전연승하는 등,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1597년 화의 결렬로 정월 15일 일본군은 다시 조선을 침략하여 죽도, 부산, 기장, 양산을 거쳐 울산에 주둔하였다. 3월 중순부터 일본의 14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와 경상도 남부 지역을 점거하는 동안 조선에서는 이순신이 무고로 하옥된 후 원균이 임명된 상태였다. 명나라는 재차 원병을 보냈다. 명군은 평양에 머무르며 남원, 성주, 전주, 충주 등에 군대를 보냈다. 조선에서는 군대를 모으고 대비하였지만 남해에서 통제사 원균이 패사하면서 한산도의 수비는 무너지고 말았다. 조명 연합군이 지키던 남원과 전주도 모두 패전하자 서울은 혼란에 빠졌다. 일본군은 전주와 공주를 거쳐 전의·진천에 이르고, 다시 그 일부가 직산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명나라 군대와 충돌하여 명군이 승리함으로써 일본군의 북상이 차단된 것이 직산 전투[소사평 대첩]라 명명된 정유재란 중의 대표적인 전투다.
천안 지역은 삼남의 요충이었으므로 임진왜란 중 군대가 통과하던 길목이 되었다. 천안 지역 출신의 사람들도 전장에 나아가 활약하였고, 이름 없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특히 정유재란 중 직산의 소사평에서 벌어진 전투와 관련하여 여러 인물의 행적이 전해진다. 당시 직산 현감 조계남은 명군 장졸과 관병에게 연락을 긴밀히 하고 군량과 수요 물품을 어김없이 조달하여 공적을 인정받았다.
천안 출신의 임진왜란 명장이 있으니 진주성 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金時敏)[1554~1592] 장군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김시민은 진주 판관으로 있던 중 병사 1,000명을 이끌고 3회 전투에 나아가 전부 승전하였다. 특히 진주성 전투에서는 7일간 적군 만여 명을 사살하며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끝내 적의 총탄에 전사하고 말았다.
직산 출신의 황세득(黃世得)은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가 선봉에서 활약하였는데,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이순신의 작품으로 알려진 「한산도가」가 사실은 황세득이 지은 것이라고도 한다.
광덕면 당하리의 유의신(柳義臣)은 가덕포 전투와 웅천포 전투에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한산도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유의신의 아들 유연(柳淵)은 19세의 나이에 아버지의 뜻을 이어 끝까지 참전하였다.
두지동 출신 장익은 무과 급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죽산과 진천 일대에서 격전을 벌이던 중 전사하였고, 목천현의 이여청, 이벽, 한혁, 빅산현의 민기서 등은 각각 의병으로 활약하였다. 이덕회는 임진왜란 중 왕을 호종하였으며, 직산 아전 김인복은 충청 감사의 장계를 가지고 의주까지 전달하였고 조계남은 군량미를 조달하고 난민을 구호하였다. 직산 아전 이응명은 중국어에 탁월해 명의 군대를 응대하였고, 신분이 낮은 이들 중에도 공을 세운 인물이 많으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
[결과]
정유재란 초기 무고로 파직 상태였던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로 기용되어 명량 대첩에 승리를 거두고 명의 대군이 일제히 남진하면서 전세는 일본에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그 와중에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일본군은 철수를 시작하였고, 조선은 육상과 바닷길을 봉쇄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뇌물을 받은 명나라 제독이 군사를 철수함에 따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순신이 노량 대첩에서 승리를 거둔 후 전사하고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은 채 가까스로 빠져나갔다. 이리하여 7년간의 임진왜란은 끝이 났다.
7년에 걸친 왜란으로 조선과 명, 그리고 일본 등 동아시아 삼국은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조선은 전 국토가 황폐화되고, 주요 문화재가 소실되거나 약탈당하였으며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전란 이후 민심 수습과 함께 경제를 살리기 위한 개혁이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