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7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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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德恢 |
이칭/별칭 | 경렬(景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경수 |
[정의]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무신.
[개설]
이덕회(李德恢)[?~1597]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어가를 호종하였고, 정유재란 때 남원 판관으로 있던 중 남원성 전투에서 순국하였다.
[가계]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경렬(景烈)이다. 아버지는 첨정을 지낸 이극(李克)이다.
[활동 사항]
이덕회는 직산 삼동면 산음리 출신으로, 20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전관의 직책을 맡아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고, 특지로 홍양 통판(洪陽通判)에 올라 군비를 강화하고 백성을 안무(安撫)하였다.
1597년에 남원 판관이 되었는데, 그해 정유재란이 일어나 남원이 왜병들에게 포위되자 명나라 부총병(副摠兵) 양원(楊元), 남원 부사 임현(任鉉) 등과 함께 남원을 수비하며 적의 무기고를 불사르는 등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왜병이 늘어나 전세가 위급해지자 양원은 성을 버리고 도망치려고 하였다. 이를 보고 크게 노한 이덕회가 장중에 꿋꿋이 서서 “총병은 천자의 명을 받아 조선을 도우러 왔거늘 위급함을 보고 도망치고자 하니 이게 옳은 일인가.” 하고 호령하니 양원이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나 결국 성이 함락되자 양원은 몰래 달아났고, 이덕회는 끝까지 분전하다가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期遠), 병사 이복남(李福男), 부사 임현 등 50여 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으며, 남원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