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리 장수 황씨 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724
한자 九龍里 長水 黃氏 世居地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문광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집성촌
가구수 10여 가구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에 있는 장수 황씨 세거지.

[개설]

구룡리 장수 황씨는 17세기에 황두증(黃斗曾)이 충청도 웅천읍 황교리 광암에서 구룡리(九龍里)로 이주하면서 입향하게 되었다.

[명칭 유래]

구룡리는 아홉 용이 구슬을 다루는 형국의 지형이라고 해서 ‘구룡(九龍)’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현황]

17세기 황두증이 입향한 이래로 현재까지도 후손들이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화망(花望)에 세거하고 살고 있다. 화망은 한글 ‘고뿌래’의 한자식 표현이다.

[입향경위]

입향조 황즙(黃葺)[1560~1613]의 호서 비인현 입향에서 시작된다. 황즙은 1592년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난을 피하여 호서의 비인현 저동[현재 충청남도 서천군 파교면 저산리]으로 낙향하였다. 황즙이 비인현 저동을 택한 이유는 처가인 풍천 임씨가 이미 저동에 입향하여 정착하고 있었던 데서 기인한다. 조선 시대 거주지 이전의 전형적인 형태인 외가나 처갓집 근처로의 이동이었던 것이다. 황즙의 아들 황정직(黃廷直)[1582~1657]은 아버지의 묘소를 웅천읍 대창리에 정하고, 비인현 저동을 떠나 웅천읍 황교리 광암에 정착하였다. 이후 구룡리 화망에 정착한 것은 황두증이 17세기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황두증의 아들 황이하(黃履夏)는 1남 5녀를 두었으나, 아들 황종복(黃種復)이 일찍 사망하면서 사촌 황이재(黃履載)의 장자인 황종흡(黃種潝)을 양자로 들였다. 사촌 황이재는 황두증의 동생인 황철증(黃喆曾)의 둘째 아들로, 현재까지 후손들이 계속 세거하고 있다.

[관련유적]

입향조인 황두증을 비롯하여 황이하, 황이재, 황종흡, 황종악(黃種岳)의 묘소가 모두 세거지인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화망 일대에 형성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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