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안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696
한자 廣州 安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문광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 시기/일시 1519년연표보기 - 안자문 입향
입향지 광주 안씨 입향지 - 충청도 남포현
묘소|세장지 광주 안씨 묘역 -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지도보기
성씨 시조 안방걸(安邦傑)
입향 시조 안자문(安子文)

[정의]

안방걸을 시조로 하고 안자문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보령 지역의 이거 성씨.

[개설]

광주 안씨는 광주(廣州)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본관의 시조는 고려 태조(太祖) 대 지방 관리였던 안방걸(安邦傑)이다.

[연원]

안방걸은 광주 지역에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면서 공으로 대장군(大將軍)이 되었고, 광주군(廣州君)으로 봉해지면서 광주를 본관으로 하사받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총랑공파(摠郞公派), 중랑장공파(中郎將公派), 사간공파(思簡公派), 판사공파(判事公派), 호군공파(護軍公派), 위위주부공파(衛尉主簿公派)의 6개 분파로 나뉘었고, 6개의 분파는 24개의 지파로 나누어져서 계통을 이어 오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 고려 후기에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내고 고려가 건국된 이후에 봉상시소경(奉常寺少卿)이 된 안성(安省)[1344~1421], 조선 성종 대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안성의 손자 안팽명(安彭命)[1447~1492], 조선 중종 대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낸 안성의 증손 안윤손(安潤孫)[1450~1520] 등이 있다. 광주 안씨 집안은 청백리(淸白吏)를 많이 배출하였다.

[입향 경위]

광주 안씨 집안이 충청남도 보령 지역에 입향하게 된 것은 안극변(安克辯)의 손자인 안자문(安子文) 때이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6세기 초에 입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자문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었기 때문에 1519년에 발생한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피하고자 남포현에 은거하면서 입향하게 되었다. 이후 안자문의 후손들이 남포현에 살게 되었다.

보령 지역에 입향한 광주 안씨는 간척 사업으로 경제적 기반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안자문의 아들 안사탁(安士擢)의 묘비에 간척과 관련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아울러 안사탁이 황교리 무성굴에 간척을 위하여 제방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가문에 내려오고 있다. 안사탁이 제방이 무너져서 매우 힘들어하였는데, 지나던 스님이 안사탁에게 “스님을 넣고 쌓아야지 제방이 무너지지 않는다.”라고 조언을 하고 난 뒤에 스님의 시신을 넣고 제방을 쌓았을 때 무너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관직에 출사하지 않았다가 안자문의 증손인 안대진(安大進)[1561~1604]이 과거의 급제하여 출사하면서 다시 관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안대진은 해운판관(海運判官)으로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후 공신에 책봉되었다.

[현황]

2015년 통계청 성씨·본관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충청남도 보령시에 거주하는 광주 안씨는 21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관련 유적]

광주 안씨 묘역은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에 형성되어 있다. 안자문의 묘소를 중심으로 안사탁, 안공필(安公弼), 안대진 등의 묘소가 모여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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