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5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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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仁渷 |
이칭/별칭 | 신지(愼之),언위(彦撝),문영(文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강종원 |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의 성주사지에 있는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의 글씨를 쓴 고려 전기 문관.
[개설]
최인연(崔仁渷)[868~944]은 고려 전기 문신으로 통일 신라 말에 고려에 귀부(歸附)하여 문한관(文翰官)으로 문명(文名)을 떨쳤다. 885년에 당나라에 유학하였으며, 909년에 귀국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견훤의 경주 침입을 계기로 고려에 귀부하여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벼슬이 대상 원봉대학사 한림원령 평장사(大相 元鳳大學士 翰林院令 平章事)에 이르렀다.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최치원(崔致遠)[857~?]의 사촌 아우, 최항(崔沆)[972~1024]의 할아버지이다.
[활동 사항]
최인연은 885년(헌강왕 11)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906년에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909년(효공왕 13)에 귀국해 집사성시랑 서서원학사(執事省侍郎瑞書院學士)에 제수되었다. 최치원의 부탁으로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사지에 현존하는 대낭혜화상탑비의 글씨를 썼다. 견훤의 경주 침입[927년]을 계기로 하여 고려에 귀부하였다. 최인연이 고려에 귀부한 시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는데, 935년(태조 18) 신라 경순왕(敬順王)[?~979]의 귀부와 같은 시기로 보기도 한다. 최인연은 고려에 가서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문한(文翰)을 위임받았다. 고려에서 선사(禪師)의 비문과 외교 문서 작성을 담당하였으며, 궁원(宮院)의 액호(額號)를 모두 찬술하였다고 한다. 벼슬이 대상 원봉대학사 한림원령 평장사에 이르렀다. 최인연은 최치원·최승우와 함께 일대삼최(一代三崔)라 불리었다.
[학문과 저술]
최인연은 서법(書法)에 뛰어났으며,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의 비문을 찬술한 최치원의 부탁으로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의 글씨를 썼으며, 「낭원대사오진탑비명(朗圓大師悟眞塔碑銘)」·「법경대사자등지탑비명(法鏡大師慈燈之塔碑銘)」 등 통일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897] 이후 고려 광종(光宗)[925~975] 때까지 찬술된 대부분의 선사 비명(碑銘)을 작성하였다.
[상훈과 추모]
944년(혜종 원년)에 정광(正匡)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영(文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