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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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廷馣 |
이칭/별칭 | 중훈(仲薰),사류재(四留齋),퇴우당(退憂堂),월당(月塘),충목(忠穆)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541년 - 이정암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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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61년 - 이정암 식년문과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67년 - 이정암 성균관전적·공조좌랑·예조좌랑·병조좌랑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68년 - 이정암 전라도도사로 치적을 올림. |
활동 시기/일시 | 1571년 - 이정암 『명종실록』 편찬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572년 - 이정암 춘당대친시(春塘臺親試) 참시관 입시 |
활동 시기/일시 | 1579년 - 이정암 도봉서원(道峰書院)과 향교를 중수 |
활동 시기/일시 | 1587년 - 이정암 동래부사로 일본인 폐단 근절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이정암 황해도관찰사 겸 순찰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96년 - 이정암 이몽학의 난 평정 |
활동 시기/일시 | 1597년 - 이정암 정유재란 때 수양산성 방어 |
몰년 시기/일시 | 1600년 - 이정암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04년 - 이정암 선무공신 2등 책록, 월천부원군 추봉, 좌의정 추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08년 - 이정암의 승전을 기념한 연성대첩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22년 - 이정암 화암서원에 제향 |
묘소|단소 | 이정암 묘소 - 황해북도 개성시 개풍군 연강리 |
사당|배향지 | 화암서원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죽성로 411[장산리 산27-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경주 |
대표 관직 | 좌의정 |
[정의]
충청남도 보령의 화암서원에 제향된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이정암(李廷馣)[1541~1600]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연안성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정암의 후손들이 충청남도 보령에 세거하였다.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류재(四留齋)·퇴우당(退憂堂)·월당(月塘)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감정(監正) 이거(李筥), 할아버지는 진사 이달존(李達尊)이다. 아버지는 사직서영(社稷署令) 이탕(李宕)이며, 어머니는 의성 김씨 김응진(金應辰)의 딸이다. 부인은 파평 윤씨 윤광부(尹光富)의 딸이다. 이조참판 이정형(李廷馨)[1549~1607]이 동생이다.
[활동 사항]
이정암은 충청남도 보령 지역 경주 이씨 가문 출신이지만 서울 반석방(盤石坊)[조선 시대 초기부터 성 밖에 있던 한성부 서부 9방 중의 하나]에서 태어나 주로 서울에서 거주하였다. 할아버지 이달존(李達尊)이 1522년에 진사시에 입격하였을 때에도 거주지는 한성[서울]이었다.
이정암은 1558년(명종 13) 진사시에 입격하고, 1561년(명종 16)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마방목(司馬榜目)과 문과방목(文科榜目)에는 거주지가 한성으로 기재되어 있다. 문과급제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문관으로서의 학문의 깊이를 보여 주는 직책은 1571년 예조정랑·사헌부지평으로 춘추관을 겸임하며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한 것과, 1572년 성균관사예에 임명되어 춘당대친시(春塘臺親試)에 참시관(參試官)으로 입시한 것이다. 외직에 나아가서도 선정을 베풀어 존경을 받았고, 부임한 지역에서 다양한 치적을 남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황해도로 들어가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의병을 모집해 연안성(延安城)을 수호하였다. 당시 도내에 주둔한 왜장 구로다[黑田長政]가 5,000~6,000명의 장졸을 이끌고 침입하자, 주야 4일간에 걸친 치열한 싸움 끝에 승리해 그 공으로 황해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1596년에는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전란 중에 벌어진 이몽학(李夢鶴)[?~1596]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죄수를 임의로 처벌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파직되었다. 다시 관직에 돌아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해서초토사(海西招討使)로 해주의 수양산성(首陽山城)을 지켰다. 전란이 끝난 후 풍덕에 정주정사(貞洲精舍)에서 은거하다 1600년 사망하였다.
1604년 연안 수비의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추봉,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이정암이 보령에 남긴 자취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정암의 후손이 세거하면서 자신들의 선조를 기리기 위하여 화암서원에서 추향(追享)을 시도하였는데, 당시 보령 경주 이씨 가문의 위상을 보여 주는 것은 보령향교에 소장된 청금록(靑衿錄)[조선 시대 성균관·사학(四學)·향교·서원 등에 비치되어 있는, 유생(儒生)들의 인적 사항을 기록한 명부]이다.
보령향교에 1861년(철종 12) 장책(粧冊)된 청금록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 청금록은 이몽규(李夢奎)[1510~1563]가 추배(追配)된 직후부터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즉, 1739년부터 1800년까지 도유사(都有司)는 모두 총 47명이었는데, 이 중 한산 이씨 7명, 광산 김씨 10명, 경주 이씨 4명으로 기록되어 거의 절반을 이들 세 성씨가 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주 이씨가 1763년에 처음으로 도유사 이이원(李以元)을 배출한 이후 토착적 지위를 강화하며 화암서원에 이몽규를 추배하고, 다시 이정암을 추배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상례초(喪禮抄)』, 『독역고(讀易攷)』, 『서정일록(西征日錄)』, 『왜변록(倭變錄)』, 『사류재집(四留齎集)』이 있다.
[묘소]
묘소는 황해북도 개성시 개풍군 연강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연안 현충사(顯忠祠)에 제향되었으며,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1922년 충청남도 보령의 화암서원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