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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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邦一 |
이칭/별칭 | 관보(寬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정의]
조선 후기 어영대장·총융사·금위대장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이방일(李邦一)[1724~1805]은 조선 후기 요직을 두루 거친 무신으로 비인 남당리[현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에 안장되었다.
[가계]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관보(寬甫)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세선(李世選)이다. 이의익(李義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이의백(李義白)의 양자가 되었다. 아들 이윤춘(李潤春)도 무과 출신이다.
[활동 사항]
이방일은 1724년(경종 4)에 무과에 급제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고, 1774년(영조 5) 51세 나이로 무과 등준시(登俊試)[조선 시대 현직 관리·종실(宗室)·부마(駙馬) 등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임시 과거]에서 18명을 선발할 때에 다시 한번 급제하였다. 무과방목(武科榜目)에서 거주지는 한성[서울]으로 기록되어 있다.
1763년(영조 39) 영흥부사로 있던 중 뇌물과 남형(濫刑) 문제로 파직당하여 단천에 유배되었다. 1766년 경상좌도수군절도사가 되고, 1769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영광군수를 역임하였고 1773년 남양부사 등을 지냈다. 1776년(정조 즉위년) 경기도수군절도사에 이어 1778년 좌포도대장이 되었다. 1779년 관내의 무녀(巫女)들을 단속하지 못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가 곧 어영대장에 임명되었다. 1780년 궁궐의 경비를 소홀히 하였다 하여 삭직되었다가, 1782년 다시 어영대장이 되었다.1784년 우포도대장이 되고 이어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1786년 총융사(摠戎使)가 되었으나,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평해현에 유배당하였고, 이듬해 풀려났다. 이때 아들 이윤춘이 영종첨사로 있다가 병을 핑계로 체직(遞職)을 요청하자, 정조(正祖)[재위: 1776~1800]는 아비가 유배형을 당했는데, 아들이 태연히 관직 생활을 하는 것이 인정에 맞지 않다며 이윤춘의 요청대로 시행해 주라고 명하였다. 1789년 다시 어영대장에 임명되었으나 과거의 죄 문제로 곧 파직되었다. 1791년 다시 총융사·어영대장·금위대장을 거쳐 대호군에 이르렀다.
전의 이씨 가문의 후손들이 보령에 세거하고 있는데, 2017년 전의 이씨 가문에서는 충청도수군절도사를 지낸 이희눌(李熙訥)[1819~1878]의 문서 등 소장 고문서를 보령박물관에 기탁하였다.
[묘소]
묘소는 선영인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