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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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袤 |
이칭/별칭 | 연지(延之),과암(果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600년 - 이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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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29년 - 이무 별시문과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41년 - 이무 사간원정언 제수, 사헌부지평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46년 - 이무 사헌부지평 사직, 정언으로 재발탁 |
활동 시기/일시 | 1649년 - 이무 해미현감으로 좌천 |
활동 시기/일시 | 1652년 - 이무 서천군수로 보임 |
활동 시기/일시 | 1656년 - 이무 필선·헌납·집의·사간·보덕 등 세자시강원과 사헌부 및 사간원 보직 |
활동 시기/일시 | 1680년 - 이무 함경도 이성·덕원으로 유배 |
몰년 시기/일시 | 1684년 - 이무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2년 - 이무 묘비는 보령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 |
거주|이주지 | 낙향지 - 충청남도 보령시 대천동 |
묘소|단소 | 한산이씨과암공이무묘비 - 충청남도 보령시 대천동 387-19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한산 |
대표 관직 | 대사헌|공조판서|예조판서 |
[정의]
충청남도 보령 지역에서 은거한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이무(李袤)[1600~1684]는 붕당정치 속에서 남인 관료로 활동한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정권이 바뀌자 충청남도 보령에 은거하였다. 유배 후에 보령에 돌아와 사망하였으며, 후손이 보령에 세거하였다.
[가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과암(果菴)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지번(李之蕃)[1508~1575], 할아버지는 영의정 이산해(李山海)[1539~1609]이다. 아버지는 한평군(韓平君) 이경전(李慶全), 어머니 안동 김씨는 임진왜란 때 사망한 김첨(金瞻)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무는 한산 이씨 문열공파 후손으로 집안이 대대로 보령의 고만 묘역을 중심으로 세거하였고, 할아버지 이산해의 묘를 충청도 예산에 조성하면서 후손의 한 계열이 예산에도 세거하게 되었다.
1629년(인조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당시 문과방목(文科榜目)에 거주지는 한성[서울]으로 기록되어 있다. 급제 후 관직 생활을 시작하며, 당쟁기에는 남인계로 좌정하였다. 할아버지가 이산해가 대북파의 영수였고, 아버지 이경전은 서인계 및 남인계와 두루 교류하였던 집안의 배경이 있었다. 이경전에게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그중 막내가 이무였다. 이무가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 이경전이 탄핵을 받은 상황이어서 거주지가 서울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무는 1641년 사간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고, 이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다. 1646년에 병을 칭하며 사직소를 올려 시폐(時弊)를 간곡히 진달(進達)하여 인조(仁祖)[재위: 1623~1649]의 신임을 얻었다. 그 뒤 호서(湖西)[충청도] 지방의 수령으로 나아가 붕당(朋黨)의 문제, 수령의 자세 등에 대한 상소와 아울러 사직소를 올렸다.
효종(孝宗)[재위: 1649~1659]이 즉위하자 대사헌 조경과 함께 언로의 막힘을 걱정하며 체차(遞差)[관원(官員)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갈아서 임명함]를 청하였다. 이어 대간(臺諫)이 김자점(金自點)[1588~1651]을 탄핵하려는데, 정언(正言)으로서 인피(引避)하고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미현감(海美縣監)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복귀하여 1652년(효종 3) 지평, 서천군수(舒川郡守)를 맡았다.
1659년 봄 전라도 담양의 수령으로 있는 동안 아버지 이경전의 글을 모아 문집을 간행하였다. 그해 1659년에 효종이 사망하자 효종의 모후[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로 1차 기해예송(己亥禮訟) 논쟁이 벌어졌다. 이무는 남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와 뜻을 함께하였다. 1차 기해 예송 논쟁은 서인들의 주장으로 일단락되었고, 이때 상소를 올린 윤선도는 유배되었다. 이 상소 사건으로 이무는 고향인 보령에 내려와 12년을 은거하였다.
1673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사망한 후에 일어난 2차 갑인 예송(甲寅禮訟) 논쟁에서 남인이 정권을 잡자 이무도 다시 중앙에 올라가 1675년에 대사헌에 이어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무는 남인으로서 서인 세력을 견제하면서 서얼을 허통(許通)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개혁적 정책에도 관여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 정권이 들어서자 이무도 관직이 삭탈되었고, 함경도 이성(利城)·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 3년 후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보령 관촌으로 돌아왔지만, 1년 만인 1684년, 85세로 사망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 정권이 들어선 후 이무의 관작이 회복되었다.
이무의 묘는 현 충청남도 보령시 대천동 관촌 뒷산에 있으며, 이곳에 이무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과암공파를 이루며 세거해 왔다. 2012년 후손들이 묘소가 포함된 주변의 종산을 보령시에 기증하였고, 현재 보령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묘소]
한산이씨과암공이무묘비와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대천동 387-19번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