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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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壽 |
이칭/별칭 | 심원(深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581년 - 김해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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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24년 - 김해수 이괄의 난 때 공주 공산성에서 공을 세움 |
활동 시기/일시 | 1627년 - 김해수 정묘호란 때 창의관이 되어 공을 세움 |
몰년 시기/일시 | 1640년 3월 20일 - 김해수 사망 |
출생지 | 서울 청파동 |
거주|이주지 | 거주지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
거주|이주지 | 낙향지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
부임|활동지 | 공주 공산성 -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 2외 |
묘소|단소 | 김해수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장곡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광산 |
대표 관직 | 청산현감|아산현감|청라면 |
[정의]
충청남도 보령 출신의 조선 후기 문신.
[개설]
김해수(金海壽)[1581~1640]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동지들을 이끌고 공주산성에 들어가 왕을 호종하였고, 정묘호란 때에는 여러 곳에서 공을 세운 뒤 말년에 보령으로 귀향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字)는 심원(深源)이다. 부인은 용인 이씨(龍仁 李氏)이다. 고려 말 왜적을 소탕하고 보령에 정착한 김성우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김인보(金隣輔), 할아버지는 김충서(金忠恕), 아버지는 김응천(金應天)이다. 김응천은 김해수의 공훈을 따라서 지평(持平)에 증직(贈職)되었다.
[활동 사항]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휘하에서 공부를 한 김해수는 이괄(李适)[1587~1624]의 난이 일어나자 백의(白衣)로 동지들을 모아 대가(大駕)[임금이 타는 수레]를 모시고 공주산성에 들어가 왕을 호종하였다. 정묘호란 때에는 김장생이 의병을 일으키자 여러 곳의 창의관(倡義官)이 되어 공을 쌓았다. 김장생의 천거로 사직서 참봉이 되었으며, 그 뒤 사옹원 봉사와 제용감 직장을 거쳐 청산과 아산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김해수는 나랏일을 함에 있어 원칙에 충실하고 일에 빈틈이 없었다. 백성을 대할 때에는 백성의 이로움을 우선으로 삼고 어질고 부드럽게 대하였다. 이러한 그의 고집과 성정을 불편하게 여긴 간사한 관리들이 김해수를 모함하여 관직에서 파직되는 일이 반복되었는데, 그때마다 백성들이 길을 막고 눈물을 흘렸다. 이에 세상살이에 뜻이 없어진 김해수는 고향인 보령 청라동(靑蘿洞)[현 청라면]으로 돌아와 강학(講學)하며 제자를 길렀다. 혹 사람들이 벼슬에 나가기를 권하여도, 그 자리에서 모두 거절하였다.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김해수의 묘비문을 지으며, 자신의 사촌형 송시영(宋時榮)[1588~1637]이 자기 다스림이 엄하여 다른 사람을 볼 때 구차스럽고 천한 것이 있으면 마치 자기까지 더럽혀질 것처럼 여겨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다만 김해수와는 서로 시골집을 지키면서 밤낮으로 즐거운 듯이 싫증내지 않고 오래도록 사귀는 것을 보고, 자신이 김해수에게 큰 절을 올렸다고 밝혔다.
[묘소]
김해수의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장곡에 있고, 송시열 찬, 송준길 서, 김만길 명의 묘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