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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가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 있는 온양온천 운영권을 인수하여 경영한 목욕 숙박시설. 신정관(神井館)은 1926년 11월 사설(私設) 철도회사 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朝鮮京南鐵道株式會社)에서 온양온천주식회사(溫陽溫泉株式會社)로부터 온양온천을 인수한 뒤에 세운 온천장(溫泉場)이다. 1945년 광복 이후 미군정청 철도국에서 신정관호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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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년(영조 36) 7월 영조와 사도세자가 온양행궁으로 왔을 때, 사도세자가 활을 쏘며 무술을 연마하던 터에 1795년(정조 19) 정조의 명으로 세운 대와 비각.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가 피부질환을 온천요법(溫泉療法)으로 치료하기 위해 부왕의 허락을 받아 26세 되던 1760년 온양행궁에 행차하였을 때 활터를 마련하고 활쏘기 연습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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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아산시 온양온천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한 도서. 『온궁육백년(溫宮六百年)』은 조선왕조 500년부터 일제강점기 신정관(神井館) 시절을 거쳐 현재에 이르는 온양온천 600년의 역사와 문화를 총정리한 단행본이다. 온궁 복원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온궁 자료를 찾는 사람은 많아졌지만 온양온천의 문화와 역사의 특수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헌이 빈약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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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무렵부터 1926년까지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 있는 온양온천에서 온양온천주식회사가 경영한 목욕 숙박시설. 온양관(溫陽館)은 온양관광호텔의 전신으로 조선시대 왕실의 온천 휴양지인 온양행궁(溫陽行宮)[온궁(溫宮)]이 1900년대 초 일본인에게 넘어가면서 기존 건물 철거 후에 세워진 건물이다. 이어 사설(私設) 철도회사 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朝鮮京南鐵道株式會社)가 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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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의 온행 때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 문과와 무과를 실시하여 합격자를 뽑아 등용한 시험. 별시(別試)는 정기적으로 치러지는 식년시(式年試) 외에 별도로 실시되던 시험이다. 유생들의 학문 의욕을 진작시키고,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실시하였다. 별시에는 증광시(增廣試), 외방별시(外方別試), 알성시(謁聖試) 등이 있었다. 왕이 온천욕을 위해 온양을 찾을 때는 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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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아산시 용화동에 있는 조선시대 우물터. 온양 어의정(御醫井)은 조선시대 세종대왕이 온양에 행궁하였을 때 휴양 중 우물에서 나오는 샘물로 눈을 씻어 안질을 치료하였다고 하여 임금의 병을 낫게 하는 우물이라 ‘어천(御川)’, ‘어정(御井)’, ‘어의정(御醫井)’, ‘어정수(御井水)’, ‘어수물’ 등의 이름으로도 불린다. 다만, 세종이 이 물로 안질을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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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신정리에 있던 조선시대의 공공 기관. 조선 역대 왕 가운데 현종 때에는 다섯 차례나 온행을 하였는데, 그중 1668년과 1669년에 두 번 요로원(要路院)을 통과하여 환궁하였다. 이순신의 백의종군[1597년] 때 한양을 떠나 경기도 평택을 거쳐 충청남도 염치읍 백암리 집으로 갈 때도 이어진 행로이다. 1676년(숙종 2) 박두세라는 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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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이며, 온양행궁의 내력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온천 문화를 간직한 온양온천 이야기. 온양온천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에 백제 온조왕 36년(18)에 탕정성(湯井城)을 쌓았다는 기록에서 비롯된다. ‘탕정(湯井)’은 끓는 물이 나오는 우물이란 뜻으로, 온양온천을 지칭한다. 역대 국왕들의 온양 방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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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온양행궁이 쇠락해진 시기에 새롭게 지은 것으로 고종 때 정치적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 함락당(涵樂堂)에 대한 기록은 고종 초반에 편찬된 『온양군지』부터 기존의 전각들과 함께 함락당과 혜파정(惠波亭)이 처음 보이고 있다.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온양군읍지』에서도 내정전과 외정전이 없어지고 혜파정과 더불어 함락당이 새롭게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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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온천 지역에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사용된 건물. 조선 전기에 건립된 온양행궁(溫陽行宮)은 여러 국왕들의 온행(溫幸) 장소였다. 조선 후기 숙종·영조·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 세자(思悼世子)]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국왕과 왕세자의 온행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헌세자 온행 이후 국왕과 왕실 종친들의 온행은 중단되었으며 온궁의 건물 등이 많이 퇴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