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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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漢應 |
영어음역 | Lee Haneung |
이칭/별칭 | 경천,국운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강진갑 |
[정의]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이다.
[활동사항]
이한응은 1892년 육영공원을 졸업하고 한성부주사와 관립영어학교 교관을 거쳐, 1901년 3월 영국·벨기에 양국주차공사관의 3등 참서관으로 런던에 부임했다. 1904년에는 서리공사로 승진하였는데, 당시 일본은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고, 뒤이어 외국인 고문에 관한 협정을 맺어 청·미국·영국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이에 이한응은 일제에게 국권이 박탈되어감을 통분하여 이를 항의하고 런던의 각국 공사들에게 한·일 관계와 한국이 독립국가임을 설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국제 사회의 현실은 이미 한국의 외교권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였고, 이한응의 노력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일제의 국권 박탈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국민과 조정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1905년 5월 12일 런던에서 자결하였다.
그의 자결은 『대한매일신보』 등 국내 민족 언론 기관에 상세히 보도되어 일제 침략에 반대하는 민족운동을 야기하는 데 큰 자극을 주었다. 1905년 9월 5일 이한응의 시신이 국내로 돌아왔으며, 그의 자결은 이후 민영환·조병세로 이어졌다.
[상훈과 추모]
1962년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