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1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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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瑾 |
영어음역 | Yu Geun |
이칭/별칭 | 석농,경집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강진갑 |
[정의]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석농(石儂), 자는 경집(敬集)이다.
[활동사항]
유근은 1898년 5월 남궁억·나수연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였으며, 1905년 11월에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매국 관료를 통렬히 비판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황제와 각부 대신들을 협박한 사실을 신문에 게재하였다.
1905년 11월 18일자 신문에 게재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인해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당한 뒤 1906년 2월 속간되자, 유근은 장지연의 뒤를 이어 사장으로 취임하여 지속적인 언론 활동을 펼쳤다.
한편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대한자강회에 가입하는 한편, 대한자강회의 강제 해산 후에는 대한협회(1907. 11.)를 발기하였다. 또 1907년 신민회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언론·출판·교육 부분에서 활동했으며, 박은식·김교헌 등과 함께 최남선이 주도하는 조선광문회에서 민족 고전을 출판하는 일에 힘썼다.
또한 1908년에 『신정동국역사』·『초등본국역사』·『신찬초등역사』를 저술하여 역사 교육에 진력하였다. 종교계에 있어서도 민족 종교의 진흥에 힘썼는데, 나철·오기호 등에 의하여 대종교가 창건되자 이에 가입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국권회복 운동에도 불구하고 1910년 조선은 일본에 의해 강제 합병되었고, 『황성신문』은 폐간되었다. 그 후 그는 여러 차례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 1917년에 경성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조선물산장려계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발각되었을 때 이들을 지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또 1919년 3·1운동 이후 한성정부라는 임시정부의 각료 선정과 정부 체제 선택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20년 4월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 언론계 원로로서 양기탁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되는 등 언론 활동을 지속하다가 1921년 서거하였다.
[상훈과 추모]
유근이 서거했을 때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그의 추도식을 거행하였으며, 1962년에는 정부에서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