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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군읍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118
한자 陽智郡邑誌
영어음역 Yangji-gun Eupji
영어의미역 Town Chronicle of Yangji-gun
분야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읍지
저자 양지군
편자 양지군
간행자 양지군
편찬연도/일시 1899년
간행연도/일시 1899년 5월연표보기|1899년 10월연표보기
권수 1권
책수 1책
사용활자 필사본
가로 22.9㎝
세로 34㎝
표제 光武三年五月日陽智郡邑誌|光武三年十五日陽智郡邑誌
간행처 양지군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처 주소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56-1[관악로 1]

[정의]

1899년 용인군에서 전국적인 읍지 편찬과 상송령에 따라 작성한 읍지.

[개설]

『양지군읍지』는 이전에 편찬한 읍지(邑誌)를 참고하여 양지군의 역사와 일반 현황을 담은 자료이다. 특히 1895년 지방관제가 개편되면서 양지군으로 변경된 이후의 사정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1899년 5월과 10월에 간행한 두 종의 자료가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편찬/발간경위]

1895년 지방관제 개편으로 양지현양지군으로 변경되어 충주부에 편제되었다가 1896년 4등군으로 지정되어 경기도 관할이 되었다. 그 사정을 담아 1899년에 읍지 편찬과 상송령에 따라 편찬, 간행한 자료이다.

[형태]

1권 1책으로, 필사본이다. 1899년 5월에 간행된 『양지군읍지』의 속표지는 광무3년 5월 일 양지군읍지(光武三年五月日 陽智郡邑誌)이다. 17장으로 이루어진 1책으로 채색지도가 첨부되어 있고, 크기는 34㎝×22.9㎝이다. 1899년 10월에 간행된 『양지군읍지』의 속표지는 광무3년 10월 일 양지군읍지(光武三年十月日 陽智郡邑誌)이다.

[구성/내용]

1899년 5월에 간행된 『양지군읍지』의 항목은 사적·관리예속액수(官吏隸屬額數)·공해(公廨)·제기(祭器)·서책(書冊)·사직단·성황당·여제단(厲祭壇)·교임(校任)·결총(結摠)·군정(軍政)·환정(還政)·호구(戶口)·풍토(風土)·토산·각면동호급원근정리(各面洞號及遠近程里)·경계(境界)·명산(名山)·대천(大川)·제언(堤堰)·인민성씨(人民姓氏)·충신·효자·열녀·사환(仕宦)·읍선생(邑先生)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적 항목에서는 고려시대의 등원군(藤原郡)부터 1895년 군 체제까지 양지군의 건치연혁을 중심으로 정리되어 있고, 관리예속액수에는 군수·향장(鄕長) 등 10개 직임 27명의 액수가, 공해에는 동헌·책실(冊室)·객사·향교 등 20개 소의 규모와 주 건물의 현판 명칭이 정리되어 있다. 결총은 밭 524결 85부 4속, 논 485결 48부 4속, 총 1,010결 33부 8속으로 나타나며, 호구는 1,672호에 남자 4,522명·여자 4,088명으로 총 8,610명이며, 토산으로는 남초(南草)가 기록되어 있다.

각면동호급원근정리에는 객사리 등 6동의 읍내면, 공세동 등 7동의 주동면, 광곡 등 11동의 주서면, 정수동 등 4동의 주북면, 쌍령리 등 8동의 고동면, 대평리 등 5동의 고서면, 약산리 등 5동의 고북면, 학일리 등 6동의 목악면, 기안리 등 3동의 박곡면, 중상리 등 5동의 고안면, 능동 등 3동의 제촌면 등, 총 11면 63동의 명칭이 정리되어 있다.

인민성씨에는 해주오씨·연안이씨·풍천임씨·전주유씨·김해김씨·김해허씨·전주최씨·죽산안씨·무송윤씨·청주한씨·수원백씨·전주이씨 등의 거주지가 기록되어 있다. 또 읍선생에는 성종 때 현감인 양원(梁瑗)부터 신용균(申容均)까지 2백여 명의 명단과 근무 기간이 정리되어 있다. 읍사례(邑事例)의 성격이 짙은 자료이다.

1899년 10월에 간행된 『양지군읍지』의 항목은 연혁사적·관리예속액수(官吏隸屬額數)·공해(公廨)·제기(祭器)·서책(書冊)·사직단·성황당·여제단(厲祭壇)·교임(校任)·방리(方里)·결총(結摠)·군정(軍政)·환정(還政)·호구(戶口)·지계전도(地界全圖)·풍토(風土)·토산·인물·충신·효자·열녀·사환(仕宦)·명산·대천·제언·본군선생안(本郡先生案)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체로 1899년 5월에 간행된 『양지군읍지』를 그대로 전재했지만, 편목 중 사적은 연혁사적, 경계는 방리, 각면동호급원근정리는 지계전도, 인민성씨는 인물, 읍선생은 본군선생안으로 바뀌었고, 그 순서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내용에서도 1899년 5월에 간행된 『양지군읍지』와 비교하여 연혁사적·사환 등에서 약간의 추가적인 내용과 자구에서 약간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으나, 이 역시 읍사례의 성격이 짙은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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