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C02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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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종길 |
방답진을 설치하게 된 배경에는 왜구가 있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왜구가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선을 주요 노략질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왜구에 대한 방어 대책은 개경이나 한양의 길목인 서해안과 남해 서부 해안에 군사력을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기틀이 정비되는 세종에서 성종 때를 기점으로 수군 기지가 전진 배치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왜구의 침략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되자 다시 남해안 중심의 방어 체제가 정비되기 시작한다.
방답진은 전라좌수영 관할하에서 사도진과 함께 첨사가 배치된 진이며, 전라좌수영 남쪽에 위치한 전초 기지였다. 1522년 5월 7일자 『중종실록(中宗實錄)』에 “병조판사 장순손이 아뢰기를 미조항·방답·가리포 등에 이미 성을 쌓도록 하였는데, 그 곳은 긴요한 방어지입니다.”하는 기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순천부 관방 방답진 조에 있는 ‘금상 18년에 설진 축성’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방답진성은 1522년(중종 17)에 축성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언제 완성되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지금의 여수시 상암동에 있었던 진례만호가 국동으로 전진 배치되어 내례만호가 설치되고 내례만호는 다시 전라좌수영으로 설치되어, 전라우수영을 중심으로 했던 방어 체제에서 전라좌수영 체제로 중심이 이동되었으며, 화양면 용주리에 있던 돌산만호진을 혁파하고 돌산도에 방답첨사진을 설치하여 만호진에서 첨사진으로 한 단계 격상시켜 수군 기지를 전진 배치시키게 되었다.
수군을 전진 배치시키게 된 배경이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군데에 걸쳐 나온다. 1477년(성종 8) 9월 20일 기록에 “순천 돌산도에 왜선 2척이 있어, 본국의 어선과 서로 싸워 병기와 잡물을 빼앗아 갔다.”는 보고가 있고, 1481년(성종 12) 9월 7일 기록에는 “9월 초2일에 우후 박윤경이 군사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돌산도 등에서 해산물을 캐던 중 왜선 3척을 만나 서로 싸우다가 박윤경과 군사 2명이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1481년(성종 12) 9월 18일 기록에는, 왕이 영돈녕 이상에게 명하여 돌산도의 왜변을 의논하게 하자 정창손·심회·윤사흔·홍응이 의논하기를, “왜적이 변경을 범하는 정상을 도주에게 효유하여 금지시키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변장에게 공격할 것을 허락하면 공을 구하여 일을 생기게 할 것이 염려스럽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같은 해 10월 1일 기록에는 더 많은 내용이 적혀 있다. “요즈음 우리나라 남쪽에는 적변이 많았습니다. 8월 15일에는 전라도 순천부의 민선이 공진암을 지나다가 적선 2척의 공격을 받아 한 사람은 부상하고 한 사람은 죽었습니다. 또 27일에는 적선 2척이 경상도 남해현 미조항과 고성현의 가도·주도·호곶이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우리 민선을 만나면 쫓아다녔습니다. 9월 초2일에는 적선 3척이 전라도 돌산도 댓개에 와서 양민 3명을 사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지금부터는 마땅히 추격하고 체포하여 압송할 것이며, 부득이 죽인 경우는 역시 그 사유를 갖추어 일러줄 것이니, 족하도 이 뜻을 깊이 알고 다시 책략을 다하여 노략질을 막고 우리나라의 울타리가 됨으로써 우리 전하께서 돌보아 주시는 두터운 은혜에 보답한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전하께서 처음에는 사신을 보내어 타이르려 하셨으나, 이번에 온 사절이 사리를 잘 알고 있어서 그 편에 명령을 전할 만하므로 사람을 따로 딸려 보내지 않으니, 그대로 양찰하시기 바랍니다.”라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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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답진 동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