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31519 |
---|---|
한자 | 五林洞 -亭子-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오림동 422-2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유화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96년 2월 - 「오림동 홀어미 정자나무」 정홍수 조사 |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6년 - 「오림동 홀어미 정자나무」, 『여수 구비문학 발간 및 무형문화재 발굴에 따른 자료조사 학술용역 결과보고서』에 수록 |
관련 지명 | 오림동 홀어미 정자나무 - 전라남도 여수시 오림동 422-2 |
채록지 | 「오림동 홀어미 정자나무」 채록지 - 전라남도 여수시 미평동 |
성격 | 설화|교훈담 |
주요 등장 인물 | 부부 |
모티프 유형 | 남편의 극락왕생을 위한 아내의 마음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오림동 느티나무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오림동 홀어미 정자나무」의 모티프가 된 느티나무는 전라남도 여수시 오림동 여수시외버스터미널에서 문수 삼거리 방면 도로 변에 서 있다. 오림동 느티나무는 1982년 12월 3일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며, 마을의 당산나무 역할을 한다.
[채록/수집 상황]
1996년 간행한 『여수 구비문학 발간 및 무형문화재 발굴에 따른 자료조사 학술용역 결과보고서』에 「홀어미 정자나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1996년 2월 정홍수가 여수시 미평동으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강진영[남, 85세]에게서 채록하였다.
[내용]
여수시 오림동 대로변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정답게 서 있다. 이곳은 수영성 서문에서 5리[약 1.96㎞] 지점으로 오리정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옛날 이곳에 젊은 부부가 세 칸 토막집을 짓고 남편은 등과를 목표로 글공부에 전념하고 부인은 남편의 뒷바라지를 위해 떡을 팔며 곤궁한 생활을 꾸려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알 수 없는 병을 얻어 자리에 누웠다. 부인은 갖은 정성을 다하여 치병을 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병세는 악화되어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하루는 남편이 부인의 손을 잡고, “결혼한 지 10년 동안 남편 노릇 한 번도 못 하고 당신 고생만 시켰으니 내 죄가 너무 커서 어찌 눈을 감고 죽을 수가 있겠소. 이생에서 못 다한 인연을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 이루어 봅시다.”라는 말을 마친 후 숨을 거두었다.
부인은 남편의 시신을 거두어 삼일장으로 장례를 치렀는데 밤이 되면 죽은 남편의 가냘픈 울음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문을 열고 나가 보면 아무 흔적이 없고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오면 또다시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일이 밤마다 계속되었다.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한 부인이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살을 기도하는 순간, 길을 가던 노승이 목이 말라 물을 얻어 먹으려고 주인을 찾다가 이 같은 현장을 목격하고 급히 달려들어 생명을 구한 후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윽고 부인으로부터 딱한 사정을 들은 스님은, “당신의 남편은 한 많은 원귀가 되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고 있으니 남편의 영혼을 위해 만인 공덕을 쌓아야 극락을 가게 된다.”고 말하였다. 부인은 스님에게 “나는 재물이 없으니 어찌 만인 공덕을 할 수가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스님은 “만인 공덕은 재물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정성에 있는 것이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는 일, 개천에 돌다리를 놓는 일, 길 가는 행인에게 쉬어 가는 자리를 제공하는 것도 모두 만인 공덕인 것”이라고 일러 주고 떠났다. 그로부터 부인은 남편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무엇으로 만인 공덕을 할까 생각 끝에, 두 사람의 미진했던 사랑을 나무를 통해 이루고자 길가에 두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오림동 홀어미 정자나무」의 주요 모티프는 ‘남편의 극락왕생을 위한 아내의 마음’이다. 나무가 크게 자라 푸른 그늘이 우거지면 길을 오가는 행인들이 쉬어 가는 자리가 되고, 이러한 것들이 공덕이 되겠거니 하는 아내의 마음을 느티나무를 통해 느낄 수 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두 그루의 나무를 홀어미 느티나무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