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31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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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烈婦昌原黃氏之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상암로478[호명동 502-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유화 |
건립 시기/일시 | 1925년 9월 20일 - 효열부 창원황씨지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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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효열부 창원황씨지비 - 전라남도 여수시 상암로478[호명동 502-2] |
원소재지 | 효열부 창원황씨지비 - 전라남도 여수시 상암로478[호명동 502-2] |
성격 | 효열비 |
관련 인물 | 창원황씨|고광선|윤용구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80㎝[총 높이]|141㎝[비석 높이]|43㎝[너비]|18㎝[두께]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호명동에 있는 일제 강점기 세워진 홍형의의 처 창원황씨 효열비.
[개설]
창원황씨(昌原黃氏)의 아버지는 황치우(黃致遇)이고, 남편은 홍형의(洪亨義)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건립 경위]
『삼강록(三綱錄)』과 『명륜록(明倫錄)』 등에 효열(孝烈)로 이름이 올라간 황씨 부인의 행적을 후대에 널리 알리고자 남양홍씨 집안에서 효열부 창원황씨지비(孝烈婦昌原黃氏之碑)를 건립하였다.
[위치]
효열부 창원황씨지비는 전라남도 여수시 상암로478[호명동 502-2]에 서 있다.
[형태]
효열각 내에 비신과 비갓이 있으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총 높이는 180㎝이고, 비석 높이는 141㎝, 너비는 43㎝, 두께는 18㎝이다.
[금석문]
비신 전면 중앙에는 ‘효열부 창원황씨지비(孝烈婦昌原黃氏之碑)’라고 쓰여 있으며, 전면 좌측 하단에는 “숭록대부 전판동영원사 윤용구 서(崇祿大夫 前判敦寧院事 尹用求 書)”라고 쓰여 있다.
후면에는 “죽어도 후사를 두고 싶은 것은 사람의 떳떳한 정이니 자기의 따라 죽고 싶은 뜻을 버리고 그 죽은 남편의 후사 두고 싶은 정을 따라 가도를 이룸으로써 이제 열부 황씨에게 보았도다. 황씨의 본은 창원이니 효정공 진의 후손 치우의 딸이니라. 친정에 있을 때부터 성품이 정숙하여 부모를 효로써 섬기고 사교를 부지런히 따라 공경히 내칙에 맞추더니 남양 홍형의에게 시집가니 친부모를 섬기는 것 같은 정성으로 시부모를 섬기되 오직 명을 따르고 남편을 어기지 않으며 아랫동서와 윗동서에 화목하고 가족들에게 화목하며 규문이 참참하더니 나이 겨우 이십이세에 형의가 병들어 침약을 써도 공이 없으니 열부가 하늘에 빌고 불두칠성에 빌어 몸을 대신할 것을 원하더니 갑자기 돌아가심에 따라 죽으려 결심하니 온 집안이 놀라 시부모 봉양하고 남편의 뒤를 이을 뜻으로 백번 위로하며 깨우치니 열부 드디어 마음을 돌리고 생각을 바꿔 빈장을 예로 따르고 두 제사에 공경함을 이루며 주곡의 슬픔을 조금도 얼굴에 보이지 않고 시부모를 효도로 봉양하여 정성의 뜻을 다하고 형의 동생의 아들 석종을 양자로 길러 망부의 뒤를 잇게 하다 일찍이 친정에 가니 부모님은 그 나이 어리고 아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겨 뜻을 빼앗으려 하니 죽으려 맹세함이 귀를 자르고 코를 베는 것보다 엄하여 바로 돌아올 때 캄캄한 고개 길을 넘으니 도깨비불이 앞을 인도하는 기이함이 있어 종족과 또 고을 사림의 포상한 일이 있으니 이금보, 삼강록, 명륜록에 기재되었다. 장하도다! 열부의 고심정열이 마땅히 만번이나 목숨을 눈 깜짝할 사이에 결단하는 것보다 어려움이 있는지라[死欲有後人之常情也而舍其自己下從之志從其亡夫有後之情以成家道今於烈婦黃氏見之黃氏籍昌原孝貞公难之后致遇女自在父家性本貞淑孝事父母服勤四教寅協内則及笄歸為南陽洪亨義室以如事之誠事舅姑惟命之從無違夫子和娣姒睦族黨閨門斬斬年□二十二享義遘疾刀主罔功烈婦禱天祈斗願以身代及其奄忽決意下從學家驚惶以養舅姑系夫後之意百端慰喩烈婦遂回心易慮殯葬依禮二祭致敬畫哭之哀小無見於容色孝養尊嫜殫極誠意取養亨義同產子錫宗以系亡夫後嘗有歸寧父母愛矜其年少無有欲奪志矢死嚴於截耳割鼻旋歸黑路越嶺有魑火導前之異自族黨及鄉隣士林有褒賞之舉事載彝衿譜三綱錄明倫錄噫烈婦之苦心貞烈富萬有難於決性命於瞥然暝目]”라고 쓰여 있다.
우측면에는 “상을 줄 기회와 형편이 없어 사신을 용납할 수 없으니 정문으로 당세에 빛나게 하지 못한즉 묻힐 것을 두려워하여 형의의 동생 상의가 기실의 글로써 광선에게 명하거늘 사양하다 못하여 드디어 그 본장을 산략하여 돌려보내노라. 을축년 음력 7월 하순 장흥 고광선 삼가 짓다[之頃而公褒靡階私伸莫容烏頭赤角未得曜於當世則湮沒是懼亨義弟相義以記實之女文命光善辭不獲遂删略其本狀而歸之. 歲 乙丑 梧秋下浣 長興 高光善 謹述]”라고 쓰여 있다.
[현황]
2021년 6월 현재 효열부 창원황씨지비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