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56 |
---|---|
한자 | 李甫欽 |
영어공식명칭 | Lee Bo-heum |
이칭/별칭 | 경부(敬夫),대전(大田),충장공(忠壯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398년 - 이보흠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429년 - 이보흠 식년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52년 - 이보흠 사헌부장령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457년 - 이보흠 순흥도호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457년 - 이보흠 박천군 유배 |
몰년 시기/일시 | 1457년 - 이보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19년 - 영주 금성대군 신단 설립 |
추모 시기/일시 | 1738년 - 이보흠 복권 |
추모 시기/일시 | 1738년 - 이보흠 이조판서 증직 |
추모 시기/일시 | 1791년 - 이보흠 증시 |
추모 시기/일시 | 1791년 - 이보흠 장릉 배식단 배향 |
부임|활동지 | 이보흠 부임지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
유배|이배지 | 이보흠 유배지 - 평안북도 박천군 |
묘소|단소 | 이보흠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죽곡리 |
묘소|단소 | 영주 금성대군 신단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2767번길 28[내죽리 96] |
사당|배향지 | 장릉 배식단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영흥리 1090-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영천(永川) |
대표 관직 | 순흥도호부사 |
[정의]
조선 전기 영주 지역에 부임한 문신.
[개설]
이보흠(李甫欽)[1398~1457]은 순흥도호부사로 있으면서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모의하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충절을 인정받아 장릉(莊陵)의 배식단(配食壇)에 배향되었고, 영주 금성대군 신단에도 위(位)가 안치되어 있다.
[가계]
이보흠의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大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아버지는 부사직을 지낸 이현실(李玄實), 어머니는 보승낭장 장표(張彪)의 딸 공인 인동장씨(仁同張氏), 할아버지는 판도판서 이석지(李釋之), 증조할아버지는 경덕재생 이흡(李洽)이다. 부인은 증 정부인 영천최씨(永川崔氏)이다.
[활동 사항]
이보흠은 1429년(세종 11)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조정에 사창법 시행을 건의하기도 했다. 1452년(문종 2)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고, 1454년(단종 2)에는 기주관으로서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7년(세조 3) 순흥도호부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순흥도호부에는 금성대군이 유배와 있었다. 금성대군은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수양대군 대신 단종을 지지해 왔었다. 이에 1455년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한 직후 탄핵을 받아 가산을 몰수당하고 순흥도호부로 유배되었다. 그런 가운데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1418~1456]·박팽년(朴彭年)[1417~1456] 등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 상왕(上王)으로 물러난 단종의 복위를 추진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 일로 단종마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군으로 유배된 상황이었다.
금성대군은 유배지에서 새로 부임한 순흥도호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에 고을의 여러 인사와 결탁하고, 이보흠을 불러 격문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이때 작성한 초안 중 “한 줌의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6척의 외로운 왕이 어디에 있는가?”와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명령하니, 누가 감히 쫓지 않으랴”라는 구절이 야사를 통해 전하고 있다. 이들은 순흥도호부의 군사와 남쪽 여러 고을에서 호응할 자들과 함께 단종을 모셔오고, 조령과 죽령의 두 길을 막고서 복위할 계책을 세웠다. 그러나 관노 급창(及唱)이 모의를 듣고 한양으로 올라가 고변함으로써 계획은 수포가 되었다.
『세조실록』에는 처음 이 고변을 알린 것이 순흥도호부사 이보흠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금성대군과 여기에 협조한 순흥도호부 지역 향리 및 사족들만 문초를 당했으나, 여러 신하의 탄핵으로 이보흠도 체포되었고, 문초 끝에 공모가 드러났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여기에 대해 순흥야사를 인용하여, 처음 관노가 한양에 고변하려고 하자 이보흠이 사람을 시켜 먼저 고변을 했고, 이어 말을 타고 직접 한양으로 올라가 고변해서 죄를 면하려고 했지만, 결국 격문을 초안한 것 때문에 체포된 것이라고 하였다. 의금부는 금성대군과 이보흠이 모의한 것으로 보고하였으며, 장(杖) 백 대에 유(流) 삼천 리의 형벌이 내려졌다. 이에 이보흠은 박천군으로 유배되었으며, 신하들의 지속적인 처형 요청에 따라 세조는 의금부도사 최계남(崔季男)을 보내 이보흠을 교살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보흠의 행적을 엮은 5권 2책의 『대전실기(大田實記)』가 전한다.
[묘소]
이보흠의 묘소는 영천시 화남면 죽곡리 단애곡(丹厓谷)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이보흠은 1738년(영조 14) 복권되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91년(정조 15)에는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를 증시하였으며,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장릉 배식단에 배향할 충신으로 선정되었다.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는 금성대군과 이보흠, 단종복위운동으로 죽임을 당한 무명의 절의 인사들을 기리기 위한 영주 금성대군 신단이 설립되어 있다. 영주 금성대군 신단은 1719년(숙종 45) 고을 사람 이기륭(李基隆)이 순흥도호부사 이명희(李命熙)에게 청원하여 처음 단소가 설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