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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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 |
영어공식명칭 | Ancient Period |
이칭/별칭 | 삼국 시대,철기 시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방용철 |
[정의]
영덕 지역의 초기 국가 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 말기까지 역사.
[개설]
영덕 지역에서 역사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진한(辰韓) 소국(小國)의 존재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통해 영덕읍과 지품면에 이르는 오십천(五十川) 상류 유역, 송천(松川)과 영해평야가 만나는 병곡면 사천리 일대에는 초기 국가 단계의 정치체제가 등장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영덕 지역은 일찍이 고구려의 영역으로서 야시홀군(也尸忽郡)과 우시군(于尸郡 )이 있었는데, 신라와 쟁탈전이 벌여졌던 곳이다. 통일 신라 시대 경덕왕은 야시홀군을 야성군(野城郡), 우시군(于尸郡)을 유린군(有鄰郡)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삼국 시대]
서기 400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391~413]은 5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위기에 빠진 신라를 구원하고, 임나가라(任那加羅)까지 진군하여 한반도 남부를 평정하였다. 이후부터 고구려는 5세기 후엽까지 신라의 수도(首都)였던 경주(慶州) 지역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내정에 간섭하는 등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영덕 지역은 이 무렵에 고구려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삼국사기』 권35 지리지 명주(溟州)조 기록에 따르면 당시의 행정명은 야시홀군과 우시군으로 나뉜다.
야시홀군은 지금의 영덕군 영덕읍을 중심으로 지품면·달산면, 청송군의 청송읍과 진보면 일대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관할하였다. 야시홀군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면 내륙의 요충지였던 안동과 영양 등지에서 주왕산(周王山)을 휘둘러 동해안 일대로 왕래할 수 있는 중요 교통로의 관문 기능을 수행하였으리라 이해된다. 특히 죽령(竹嶺)이나 조령(鳥嶺)을 넘어 신라의 영역 내로 진출한 고구려가 동해안을 거쳐 경주 지역으로 남하(南下)하기 위한 군사적 거점으로 중요시되었을 것이다.
우시군은 지금의 영덕군 영해면과 창수면·병곡면·축산면 일대를 관할하였는데, 이 지역은 동해안 제일의 농업 생산량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서쪽의 영양, 북쪽의 울진 지역과 교통할 수 있는 수륙 교통의 요지에 해당하였으므로 동해안 일대의 경제력과 해로 교통의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고구려와 신라의 치열한 각축장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삼국사기』 권37 지리지 하슬라주(何瑟羅州)[지금의 강릉] 조에도 야시홀군과 우시군이 보이는데, 이것은 동해안 지역 간의 교통에 있어서도 영덕 지역이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했기 때문에 정치·군사적 필요성에 따라 소속이 달라진 결과라 볼 수 있다.
영덕 지역은 늦어도 481년 무렵에는 완전히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당시에 장수왕은 흥해 지역까지 진군하였다가 신라·백제·가야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이하(泥河) 일대까지 퇴각하였는데, 이후 다시는 소백산맥을 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영덕 지역에 군사적으로 진출하였다고 하더라도 점유 기간이 길지 않았고, 지방관을 파견하거나 재지세력을 재편하지 못하였으므로 지배력 행사는 간접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통일 신라 시대]
5세기 후엽에 신라로 편입된 영덕 지역은 동해안로를 따라 북쪽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경상북도 북부의 내륙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수륙 교통의 결절점으로 중시되었다. 이에 따라 야시홀군과 우시군 역시 신라의 점유 이후 동일한 기능을 유지하였으며, 수도였던 경주 지역에 가까웠던 만큼 신라의 해상 교통로 장악을 위해 일찍부터 강력한 직접 지배가 실시되었으리라 추측된다. 757년에 경덕왕이 통일 왕조의 지방행정 체제를 개편하고, 한자식 지명을 부여하면서 야시홀군은 야성군(野城郡), 우시군은 유린군(有鄰郡)으로 각각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