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17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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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來秉 |
이칭/별칭 | 박내봉(朴來鳳),박래병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상구 |
[정의]
개항기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개설]
박내병(朴來秉)[?~1908]은 경기도 가평 출신으로 박내봉(朴來鳳)으로도 불렸다. 고향에서는 덕망 있는 유생이었으며, 의병장으로서 지도력이 뛰어나고 자상하여 부하들뿐만 아니라 다른 의병 부대에까지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활동 사항]
박내병은 1905년 11월 일제에 의해 강요된 을사늑약과 1907년 7월 정미7조약에 따른 군대 해산 등에 분노하여 고향인 경기도 가평에서 총기와 곤봉 등으로 무장한 30여 명을 모집해 의병을 일으켰다. 박내병은 의병 부대를 이끌고 경기도 포천(抱川)·음죽(陰竹)·이천(利川)·광주(廣州)·가평(加平)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양주에서는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8월에는 강원도 횡성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하기 위해 부대 규모를 300여 명으로 확대하였다. 횡성에서 지영기(池永基) 의병 부대와 연합하여 5, 6차례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8월 23일 다시 양주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9월에는 강원도 인제군으로 부대를 이동하여 의병장 민긍호(閔肯鎬)[?~1908]를 비롯하여 한갑복(韓甲復), 최두환, 주석민, 장기환, 권득주 등 여러 의병 부대들과 연대하여 1만여 대규모 의병 부대를 형성, 인제군 선창면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양주의 존지락구(存芝樂九)라는 촌락과 영평군(永平郡)[현 포천시의 일부]의 지구유지(芝久留地)라는 촌락에서 각각 군수품과 군자금 확보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광릉천 부근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음력 10월 이후 양주와 가평에서 일본군과 두 차례 교전하였고, 12월 하순경에는 군자금과 군수 물자를 모으는데 주력하였다. 특히 부하였던 김경운(金景云)[1861~1908]이 중심이 되어 경기도 통진군(通津郡)[현 김포시의 일부]에서 엽전 2,300냥과 군수품을 모았고, 고양군(高陽郡)에서도 군자금과 군수품 확보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에도 통진·고양 일대의 선등사(先登寺), 석지원(石池原), 송래기(松來基)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3차례 교전하였다.
박내병 의병 부대에 참가한 주요 인물로는 경기도 통진군 출신인 김경운과 양주 출신인 안배언(安拜言)[?~1908]이 있었다. 박내병은 이후에도 꾸준히 의병 활동을 펼쳤으나, 의병 활동을 시작한 지 1년 만인 1908년 8월 경기도 양주군 초부면 고랑(高浪)에서 일본군과 교전중에 전사하였다. 이때 부하들의 슬픔이 대단하였다고 전한다.
[상훈과 추모]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