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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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仁淳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명환 |
[정의]
개항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의병장.
[활동 사항]
윤인순(尹仁淳)[1880~1909]은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윤인순은 농업에 종사하다가 1907년 일제의 책동으로 군대 해산이 강행되자 독자적으로 의병 부대를 일으켜 의병장으로서 양주 석치에서 적과 접전하였고, 그 후 파주·적성·포천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말 경기 의병 부대가 연합하여 점차 13도 연합 의병 부대로 확대되어 이인영(李麟榮)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어서 서울 진격을 계획해 12㎞[30리] 지점까지 접근하였지만 좌절되었다.
윤인순 의병 부대는 임진강 일대에서 잔류 의병들을 규합하여 세력 확대를 꾀하던 허위(許蔿) 의병 부대에 합류하였으며 윤인순은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국내외의 세력 규합을 모색하던 중 허위가 1908년 6월에 체포되었고 10월에 적의 침입을 받자 다른 의병 부대와 같이 소규모의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추세로 전환하였다. 윤인순은 파주·적성·양주 등지에서 30~40명 단위로 나누어 의병 활동을 하였다.
1909년에 육상과 해상·도서 지방인 양주·파주·포천·영평·연천·삭령·금천·배천 등에서 이은찬(李殷瓚)·정용대(鄭用大)·강기동(姜基東)·연기우(延基羽) 등과 연합 부대를 형성하여 활약하였다. 항전을 계속하던 중 1909년 3월 17일 양주 북방 4리에서 삭령수비대(朔寧守備隊)와 전투를 벌이다가 부하 16명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윤인순의 부하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형 집행을 받은 송창근은 1907년 12월에 양주의 한승교(韓承敎)에게 군자금 20원을 거둔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았다. 당시 25세의 서춘만(徐春萬)과 35세의 윤치대(尹致大)는 1908년 11월 9일 고양군의 이치안(李致安)과 정흥택(鄭興澤)의 집에서 의병용 쌀을 거두려 한 혐의로 각기 유형 5년형을 선고 받았다. 29세의 김경록(金京錄)과 김해룡(金海龍)은 1908년 10월에 일진회원 처형에 참여한 혐의로 각기 유형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런 점을 볼 때 윤인순 의병 부대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활동은 이강산(李江山)의 지휘 하에서 혹은 정용대 의병 부대 소속 부대원들과 합동 작전에 의하여 수행된 것이었다.
[상훈과 추모]
1982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