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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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永年 |
이칭/별칭 | 백영현(白永賢)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명환 |
[정의]
개항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의병.
[활동 사항]
백영년(白永年)[1883~?]은 경기도 양주군 석적면 율암리 사람으로 목수 일에 종사하였다[백영현(白永賢)이라고도 함. 1992년 양주문화원에서 발행한 『양주군지』에는 경기도 파주군 천현면 갈곡 출신 백영년(白永年)으로 되어 있음]. 1909년 당시 27세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백영년은 1883년생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영년은 지속적인 반일 의병 투쟁을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윤인순(尹仁順)·정용대(鄭用大)의 의병 부대에 들어가 양주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윤인순은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한 이후에 봉기하여 경기도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의병장으로, 1908년 이후에는 30~40명 단위의 소규모 유격 방식으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정용대는 대한 제국 군대의 정교(正校) 출신으로 군대가 해산된 이후에 국권 회복을 위하여 스스로 창의좌군장(倡義左軍將)이라 칭하고, 경기도 적성·양주·풍덕·교하·통진 등지에서 수백여 명의 의병 부대를 이끌고 지속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면서 일본군과 수차례에 걸쳐 접전하였다.
백영년은 정용대 의병장의 지시에 따라 1908년 음력 12월 20일 동지 이건칠(李健七)과 함께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리(白石面里) 송범석(宋範錫)으로부터 군자금 6,000냥을 징수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광석면리 이계운(李季雲)으로부터 군자금 5,000냥을 징수하여 의병 자금을 수합하였다.
백영년은 1909년 음력 6월 초 이사용(李思容)·이장복(李章福)·김현기 등 동지 30~40명과 양주군 석적면 덕도리[혹은 대지리였다고 함. 현 양주시 광적면 덕도리]에 병기를 휴대하고 주둔하면서 3,000냥을 징수하는 등 주로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였다. 활발하게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던 백영년은 체포되어 경성지방재판소에서 1909년 8월 21일 징역 5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5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