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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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裕寅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전정해 |
활동 시기/일시 | 1889년 12월 - 양주목사 부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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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1년 11월 - 양주목사 퇴임 |
활동 시기/일시 | 1900년 - 경무사 겸 평리원 재판장 임시서리 |
활동 시기/일시 | 1904년 - 보안회를 조직함 |
부임|활동지 | 양주 -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대표 관직 | 양주목사 |
[정의]
개항기 양주목사를 지낸 문신.
[활동 사항]
이유인(李裕寅)은 1889년(고종 26) 12월부터 1891년(고종 28) 11월까지 양주목사를 지냈다. 1890년(고종 27) 익종[순조의 아들]의 비였던 신정왕후(神貞王后)가 승하하여 수릉(綏陵)[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소재]에 합장할 때 공사를 잘 마무리한 공으로 품계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올라갔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이유인이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총애를 받았던 무녀 진령군(眞靈君)과 가까이 하여 양주목사 직을 얻었다고도 한다.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의 구술 자료에는 고종 때 한양으로 가 점을 쳐서 잃어버린 옥새를 찾아내고 양주목사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00년(고종 37) 5월 경무사 겸 평리원 재판장 임시서리로 재임할 때 안경수(安駉壽)와 권형진(權瀅鎭)을 임금의 재가 없이 죽인 죄로 벼슬을 빼앗기고 10년형을 받았으나 한 달 만에 풀려났다.
1904년(고종 41) 일본이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심상진(沈相震) 등과 보안회를 조직하여 국권 회복 운동을 벌였다. 일본의 정탐 기록에 따르면 항일 의병 운동에 앞장섰던 허위(許蔿) 등과도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1910년 한일 병합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