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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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明溍 |
이칭/별칭 | 이양(夷襄),서원군(西原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창래 |
출생 시기/일시 | 1426년 - 한명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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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53년 - 진사시 급제, 선공녹사 |
활동 시기/일시 | 1454년 - 계공랑, 전구서 승 |
몰년 시기/일시 | 1454년 - 한명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454년 - 시호를 받고 무공랑에 봉해짐. 가정대부 병조 참판에 추증됨 |
추모 시기/일시 | 1470년 - 시호가 바뀌고 지의금부사 서원군에 봉해짐 |
추모 시기/일시 | 1522년 - 묘표 건립 |
묘소|단소 | 한명진 묘 - 경기도 양주시 어하고개로 27-125 산73[옥정동]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청주 |
대표 관직 | 전구서 승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할아버지는 예문관 제학 한상질(韓尙質)이고, 아버지는 감찰 한기(韓起)이다. 어머니는 여주 이씨로 대제학 이적(李逖)의 딸이다. 형은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이다. 부인은 안동 권씨로 우찬성 권제(權踶)의 딸이다. 아들은 대사헌을 지낸 청평군(淸平君) 한언(韓堰)이다. 청주 한씨는 한언 대에 부평부[현 구로 지역]에 정착하였다.
[활동 사항]
한명진(韓明溍)[1426~1454]은 1453년(단종 1) 진사시 합격 후 선공녹사(線工錄事)가 되고, 형 한명회와 함께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계유정난[수양대군이 왕권을 빼앗기 위해 반대파를 제거한 사건]에서 공을 세워 1454년(단종 2) 추충정난공신(推忠靖難功臣) 3등에 녹훈되고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계공랑을 거쳐 전구서 승(典廐署丞)에 재임 중 세상을 떠났다.
[묘소]
경기도 양주시 옥정동 고암동마을 남쪽 서향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 한명진의 무덤은 원래 옹암(瓮岩) 서쪽 기슭 묘좌(卯坐)에 있었는데, 새 도로를 만들면서 2001년에 옥정동으로 이장한 것이다. 서쪽을 향한 단분 합장묘이다. 묘표, 상석, 향로석, 문인석 등을 갖췄으며 상·중·하 삼계로 구성되었다. 상계의 계체석은 상석의 잎 받침돌로 사용되고 있다. 중계에는 문인석을 배치하였고, 하계에는 석물이 없다. 1522년(중종 17)에 세워진 묘표는 하엽형 2면 비로, 관석의 크기는 너비 52㎝, 높이 26㎝, 두께 21㎝이고, 비신은 너비 38㎝, 높이 75㎝, 두께 13㎝이다. 복두공복(僕頭公服) 차림의 문인석은 193㎝이다.
[상훈과 추모]
1454년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이후 양도(襄悼) 시호와 함께 무공랑에 봉해졌다. 공이 있어서 양(襄), 중년에 일찍 죽어 도(悼)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종의 시호와 같아서 1470년(성종 1) 이양(夷襄)으로 바뀌었다. 시법에 안심하고 정숙을 좋아함을 이(夷), 일에 따라 공이 있음을 양(襄)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