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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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曼殊 |
이칭/별칭 | 득휴(得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정덕 |
활동 시기/일시 | 1374년 - 밀직부사, 조전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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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379년 - 수졸로 강등, 복직 |
활동 시기/일시 | 1379년 - 동지밀직사사, 경상도원수를 겸한 합포도 순문사 |
활동 시기/일시 | 1388년 - 금포 원수, 지문하부사, 파직 |
활동 시기/일시 | 1389년 - 절제사 |
활동 시기/일시 | 1390년 - 문하평리상의 겸 응양군 상호군, 문하찬성사 |
활동 시기/일시 | 1392년 - 개국원종공신, 판개성부사 |
활동 시기/일시 | 1393년 - 회군1등공신에 추록됨, 문하시랑 찬성사 |
몰년 시기/일시 | 1398년 - 유만수, 제1차 왕자의 난 때 피살 |
추모 시기/일시 | 1423년 - 신원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56년 - 자손 출사가 허용됨 |
묘소|단소 | 묘소 - 경기도 양주시 남면 경신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문화 |
대표 관직 | 문하시랑 찬성사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여말 선초의 무신.
[가계]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득휴(得休). 아버지는 우부대언(右副代言) 유총(柳總)이다. 아들은 유원지(柳源之), 유은지(柳隱之), 유연지(柳衍之)이다. 손자는 유종(柳淙)이다.
[활동 사항]
유만수(柳曼殊)[?~1398]는 고려 공민왕 때 보마배행수(寶馬陪行首)에 올랐고, 장군 등 무관직을 두루 거쳐 벼슬이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이르렀다. 1374년 우왕이 즉위한 직후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내고 왜구가 침범하자 이성계(李成桂), 임견미(林堅味), 변안렬(邊安烈) 등과 함께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소탕하였다. 1379년(우왕 5) 양백연(楊伯淵)의 송사(訟事)에 휘말려 변방을 지키는 수졸(戍卒)로 강등되었다가 얼마 후 복직하였다. 1379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이어 경상 도원수를 겸한 합포 도순문사(合浦都巡問使)에 올랐다. 1388년(우왕 14) 금포 원수로 있을 때 왜구가 120척의 배로 침략해 오자 정지(鄭地)의 지원을 받아 남해 관음포에서 17척을 침몰시키고 격퇴하였다.
1388년 5월 이성계와 요동 정벌을 떠났다가 군대를 돌린 위화도 회군에 동참하였다. 개경 전투에서 최영(崔瑩)에게 패하였으나 이성계 정예군의 도움으로 무사히 빠져나갔다. 이후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회군공신(回軍功臣)이 되었다. 그러나 허응(許應)의 재물을 빼앗고 효도를 하지 않는 등 재상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탄핵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1389년(창왕 1) 왜선 20척이 황해도 해주로 쳐들어오자 절제사가 되어 이방과(李芳果)[후에 정종]와 함께 출정하였다. 1390년(공양왕 2) 김저(金佇)에게 이성계의 암살을 지시한 죄로 체포된 우왕을 강릉으로 압송하는 일을 맡았다. 그 공으로 문하평리상의(門下評理商議)를 겸한 응양군 상호군(應揚軍上護軍),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다.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 후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봉해지고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에 올랐다. 이듬해 회군1등공신에 추록되고 벼슬이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에 이르렀다. 하지만 정도전(鄭道傳)을 중심으로 한 신권파에 가담하여 1398년(태조 7) 제l차 왕자의 난 때 아들 유원지와 함께 이방원(李芳遠) 세력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유만수 부자가 세상을 떠난 뒤 손자 유종은 포천 자작리로 낙향하여 포천 문화 유씨의 입향조가 되었다. 유만수는 1423년(세종 5)에 신원되었고, 1456년(세조 2)에 자손의 출사가 허용되었다.
[묘소]
경기도 양주시 남면 경신리에 무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