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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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권만용 |
활동 시기/일시 | 1574년 - 경상 좌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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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76년 - 경상 우병사 |
활동 시기/일시 | 1586년 - 강화 부사 |
활동 시기/일시 | 1587년 - 경상도 방어사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중위대장, 부원수 |
몰년 시기/일시 | 1592년 - 신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해유령 전첩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충현사 건립 |
사당|배향지 | 현충사 - 황해도 연안 |
사당|배향지 | 충현사 -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부흥로[연곡리 346-5]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평산 |
대표 관직 | 부원수 |
[정의]
임진왜란 때 경기도 양주의 해유령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조선 전기의 무신.
[가계]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신의충(申義忠)이다. 부인은 전주 이씨이다.
[활동 사항]
신각(申恪)[?~1592]은 무과에 급제하여 선조 재위 초에 연안 부사와 영흥 부사를 거쳐 1574년(선조 7) 경상 좌수사, 1576년에 경상 우병사를 역임하였다. 1586년(선조 19) 강화 부사를 거쳐 이듬해 경상도 방어사가 되었다. 하지만 영흥 부사 재임 시 신창 현감(新昌縣監) 조희맹(趙希孟)이 첩의 아들을 납속(納贖)[곡식 바치게 하고 그 대가로 벼슬을 줌]을 해서라도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자 관청의 곡식을 대신 내주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성대장(守城大將) 이양원(李陽元) 휘하의 중위대장(中衛大將)에 임명되었고, 이어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 휘하의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한강을 지켰다. 김명원이 싸우다 임진강으로 도망가자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과 함께 양주로 가서 흩어진 군사를 모았다. 이어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혼(李渾)의 부대와 합세하여 양주 해유령[게너미고개]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러 적의 머리 70급(級)을 베었다. 이것이 임진왜란 때 육지에서 최초로 승리한 전투였다.
하지만 김명원이 패전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신각이 명령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다른 곳으로 갔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려 우의정 유홍(兪泓)에 의하여 참형되었다. 같은 날 오후 양주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전령이 도착하자 임금은 급히 신각을 죽이지 말라는 전갈을 보냈으나 이미 처형된 뒤였다. 충직한 무인이었던 신각이 억울하게 죽자 모두가 애석해 하였다.
[상훈과 추모]
신각은 황해도 연안의 현충사(顯忠祠)에 배향되었다. 1977년 4월 21일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산28-9번지에 임진왜란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해유령 전첩비가 세워졌다. 기단 면적 132㎡, 높이 10.6m, 둘레 4.8m 규모로, 경기도 기념물 제39호이다. 1991년 해유령 전첩비 인근에 충현사(忠顯祠)가 건립되었다. 태극 문양이 그려진 홍살문의 삼문은 맞배지붕 형태이고, 문 양쪽에 돌담을 쌓아 재형각을 둘러쌌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주추 위에 원통형 기둥을 세워 익공을 쌓은 무출목 초익공 양식이며 골기와지붕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5월 19일 신각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