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7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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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成希顔 |
이칭/별칭 | 우옹(愚翁),인재(仁齋),충정(忠定)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권만용 |
출생 시기/일시 | 1462년 -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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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80년 - 생원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485년 - 별시문과 을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99년 - 군기시 부정, 종사관 |
활동 시기/일시 | 1503년 - 동지중추부사 |
활동 시기/일시 | 1504년 - 이조 참판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부사용으로 좌천 |
활동 시기/일시 | 1506년 - 중종반정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507년 - 판의금부사 |
활동 시기/일시 | 1509년 - 우의정 |
활동 시기/일시 | 1510년 - 병조 판서 |
활동 시기/일시 | 1513년 - 영의정 |
몰년 시기/일시 | 1513년 -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513년 - 충정(忠定) 시호 받음 |
묘소|단소 | 묘소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29번길[일영리 산65-1] |
신도비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29번길[일영리 산65-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창녕 |
대표 관직 | 영의정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우옹(愚翁), 호는 인재(仁齋). 증조할아버지는 성부(成溥)이고, 할아버지는 성효연(成孝淵)이며, 아버지는 돈녕부 판관 성찬(成瓚)이다. 어머니는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딸이다. 부인은 정경부인 풍양 조씨로 조익상(趙益祥)의 딸이다. 형은 성희증(成希曾)이다.
[활동 사항]
성희안(成希顔)[1462~1513]은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85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었고 부수찬으로 승진하였다. 숭유(崇儒) 정책을 편 성종[재위 1469~1494]의 자문을 맡을 정도로 유학에 뛰어났다. 성희안이 효자라는 소문을 듣고 매 한 마리를 하사하면서 “이 매로 사냥하여 노모를 공양하라”고 당부하였을 정도로 임금의 총애가 깊었다.
1499년(연산군 5) 군기시 부정으로 서정도원수 이계전(李季全)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고 1503년(연산군 9) 동지중추부사 사은사 부사가 되어 명나라를 방문, 왕세자 책봉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형조 참판, 가선대부에 이어 1504년(연산군 10) 이조 참판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낼 때는 양화도 망원정(望遠亭)에서 훈계적인 내용을 담은 풍자시를 지어 연산군(燕山君)에게 올렸다가 노여움을 샀다. 이 일로 무관 말단직인 부사용(副司勇)으로 좌천되었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1506년(연산군 12)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과 모의하고 신윤무(辛允武), 박영문(朴永文), 홍경주(洪景舟) 군대의 도움을 받아 임금과 그 일파를 쫓아내고 진성대군(晋城大君)을 왕으로 옹립하니 그가 중종이다. 중종반정 이후 병책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策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졌다. 관직은 형조판서·이조판서에 이어 숭록대부에 올랐다. 1507년(중종 2)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으로서 판의금부사를 겸하여 반정을 수습하였다.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할 때는 박원종과 유순정의 공이 더 크다며 세 번째에 섰다.
중종에 대한 명나라의 고명(誥命)[왕의 즉위를 인정하는 제도]이 떨어지지 않자 직접 청승습사(請承襲使)로 나서 명나라에서 승인을 받아 왔다. 이후 실록 총재관을 맡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편찬을 주관하였고, 1509년(중종 4) 우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와 병조 판서를 겸하여 군무를 총괄하였다. 대간이 ‘반정 공신의 다수를 차지하는 무신의 편을 들어 선비의 기풍을 능멸하였다’며 성희안을 탄핵하였으나 임금의 신임이 두터워 오히려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1513년(중종 8) 영의정에 올랐다가 이해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65-1번지[권율로 29번길]에 있다. 정경부인 풍양 조씨와 합장묘이다. 봉분 양쪽에 문인석과 무인석이 있다.
[상훈과 추모]
1513년 성희안이 세상을 떠나자 ‘몸을 위태롭게 하면서도 임금을 받드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안정시키기에 생각을 원대히 하는 것을 정(定)이라 한다’는 뜻으로 충정(忠定)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신도비는 좌의정 신용개(申用漑)[신숙주의 손자]가 글을 짓고, 김희수(金希壽)가 글씨를 썼다. 비신이 측면을 향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