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7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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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轍 |
이칭/별칭 | 경유(景由),쌍취헌(雙翠軒),강정(康定),복상(福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권만용 |
출생 시기/일시 | 1503년 - 권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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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28년 - 진사 |
활동 시기/일시 | 1534년 - 성균관, 예문관 검열, 좌천 |
활동 시기/일시 | 1537년 - 복직 |
활동 시기/일시 | 1539년 - 수찬 |
활동 시기/일시 | 1550년 - 승정원동부승지 |
활동 시기/일시 | 1553년 - 도승지 |
활동 시기/일시 | 1556년 - 형조 판서 |
활동 시기/일시 | 1565년 - 우의정 |
활동 시기/일시 | 1567년 - 좌의정 |
활동 시기/일시 | 1571년 - 영의정 |
몰년 시기/일시 | 1578년 - 권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47년 - 신도비 재건립 |
묘소|단소 | 묘소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석현리 산168-1] |
신도비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석현리 산168-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안동 |
대표 관직 | 영의정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권철(權轍)[1503~1578]은 낮은 관직에 있을 때부터 몸가짐이 신중하여 일찍부터 재상의 중망이 있었다고 하며, 비록 출중한 재기는 없었으나 청신하게 법을 지켜 감히 허물하지 못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복상(福相)이라고 칭송하였다.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유(景由), 호는 쌍취헌(雙翠軒). 할아버지는 양근군수 권교(權僑). 아버지는 강화부사 권적(權勣), 어머니는 순흥 안씨(順興安氏)로 안탁(安擢)의 딸이다. 부인 정경부인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적순부위 조승현(曺承晛)의 딸이다. 셋째 아들이 의금부사 권순(權恂)이며, 넷째 아들이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도원수 권율(權慄)이다.
[활동 사항]
권철은 1534년(중종 29)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관리, 예문관 검열을 거쳐 사관이 되었다. 실록의 기초 자료가 되는 사초를 쓸 때 외척으로서 세도를 부리던 좌의정 김안로(金安老)의 전횡(專橫)을 사실대로 적었다가 미움을 사 좌천되었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죽은 뒤 복직되어 육조의 좌랑과 정랑, 사간원 직강, 홍문관 교리,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승정원에 들어가 도승지에 올랐다.
1556년(명종 11) 형조판서일 때 호남의 신중(新中)에 왜구가 침범하자 관찰사 겸 도순찰사가 되어 왜구를 소탕하고 돌아왔다. 1558년 명나라의 책세자사신(冊世子使臣)이 올 때 원접사가 되어 마중하였으며, 1561년 우찬성에 임명되었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文貞王后)의 죽음과 함께 외척으로 패악을 부렸던 병조판서 윤원형(尹元衡)이 쫓겨나고, 권철이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좌의정에 이어 1571년(선조 4) 영의정에 올랐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산168-1번지에 있다. 부인과 쌍분으로 모셨으며 묘갈, 문무석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강정(康定)이다. 신도비는 권율 장군 묘 입구에 남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비좌 위에 한 덩어리의 흰 대리석을 쪼아서 만든 비신과 이수[머릿돌]가 올려져 있다. 원석의 무늬가 선명한 비신에는 ‘공몰후이백육십구년정미팔월 일립(公歿後二百六十九年丁未八月日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기록을 통해 1847년(헌종 13)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가 오래되어 다시 세운 것으로, 비문은 오위도총부 총관 이민구(李敏求)가 짓고, 11세손 승문원 부정자 권응기(權應夔)가 썼으며 11세 외손 의정부 검상 이유원(李裕元)이 전액(篆額)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