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10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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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氏兄弟孝子碑 |
영어의미역 | Monument to the Filial Piety of Jeon Clan Brother |
이칭/별칭 | 효자증통정대부도정전병모지려,효자증통정대부도정전술모지려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437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최인표 |
성격 | 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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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913년 |
관련인물 | 전병모|전술모 |
재질 | 화강암 |
높이 | 126㎝ |
너비 | 42.5㎝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437 |
소유자 | 옥천전씨 문중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 건립된 조선 말기 전병모·전술모 형제의 효자비.
[개설]
전씨형제 효자비는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화구마을의 전병모·전술모 형제의 효자비이다. 전술모의 자(字)는 문칙(文則)이며, 호는 송은(松隱)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후예이며, 아버지는 가선대부 전종복(全宗復)이다. 전술모는 경전과 역사책에 능하고 글을 잘 썼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부모가 병들자 대변을 맛보아 병의 정도를 가늠하였고, 위독할 때는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여 연명케 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여는 비바람을 무릅쓰고 묘 옆에 움막을 지어 3년간 시묘를 하는데 피눈물을 흘리는 등 매우 슬퍼하였다. 전병모는 전술모와 같이 부모에게 효도를 지극히 하여 부모를 시묘할 때는 호랑이가 호위하고, 샘이 솟아오르는 등의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술모·전병모 형제의 효성을 기리고자 1894년(고종 31) 3월 13일에 정려를 명하고 증직으로 통정대부도정관과 동몽교관을 내렸으며, 1913년 후손들이 전씨형제 효자비를 세웠다.
[위치]
전씨형제 효자비는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437번지 화구마을에 있으며, 국도 7호선 도로가 마을 서쪽을 바로 지나고 있으며, 남쪽으로 남대천이 동해로 흘러가고 있다. 북쪽에는 월송정과 평해중학교가 있으며, 서남쪽으로는 월송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형태]
전씨형제 효자비는 단칸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은 비각 안에 있다. 1958년에 건립한 비각은 정면인 동쪽을 틔워 철제 구조물로 막고 출입문을 달았으며, 나머지 부분은 높이 1.5m, 너비 1m 정도 되는 둔덕을 만들고 내부는 석축을 하여 마감하였는데 도로보다 낮다. 비각의 중앙에 전씨형제 효자비가 있고, 서쪽 벽면에는 정려현판이 있다. 전씨형제 효자비는 화강암으로 제작한 귀접이 형태의 비신이 직사각형 형태의 비좌에 고정되어 있으며, 비신은 높이 89㎝, 너비 42.5㎝, 두께 14㎝이다. 비좌의 윗면은 연화문을 조각하여 장식하였으며, 비좌의 규모는 가로 88㎝, 세로 59㎝, 높이 37㎝로 전체 비석의 높이는 126㎝이다.
[금석문]
전씨형제 효자비 전면에는 세로로 “효자통정대부도정전병모전술모지려(孝子通政大夫都正全炳謨全述謨之閭)”라고 새겼는데 글자의 크기는 가로 7㎝, 세로 9㎝이다. 후면과 측면에는 전병모와 전술모 형제의 효행과 관련한 행적과 비의 건립 시기와 건립자를 새겼는데 글자의 크기는 가로 2.5㎝, 세로 3㎝이다.
측면에는 “개국오백이십이년계축(開國五百二十二年癸丑)”이라는 건립 연대를 새기고 있어, 전씨형제 효자비가 1913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후에도 조선왕조 개국 후 522년이라 표현하고 있어 민족의식의 일단을 볼 수 있다.
한편, 전씨형제 효자비의 건립은 비석 주인공의 손자 전대련(全大鍊)·전희련(全喜鍊)·전수련(全秀鍊)·전보련(全輔鍊)과 증손자인 전여홍(全汝弘)·전여원(全汝元)·전여준(全汝俊)·전여웅(全汝雄)이 주관하였다. 정려 현판은 가로 118㎝, 세로 47㎝로 검은색 바탕에 세로 10줄 흰 글씨로 “효자증통정대부도정전병모지려(孝子贈通政大夫都正全炳謨之閭)”와 “효자증통정대부도정전술모지려(孝子贈通政大夫都正全述謨之閭)”라고 썼는데, 글자의 크기는 가로 6.5㎝, 세로 6.5㎝이다.
전씨형제 효자비의 비문은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전씨형제의 효성이 매우 지극하여 어버이를 모시는 것이 증자가 어버이를 모시면서 항상 술과 고기를 드린 것에 견주어 부끄럽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구체적으로 전씨형제가 어버이를 모시면서 직접 실천하였던 사례와 돌아가신 다음에는 예에 맞게 장례하고, 3년을 시묘한 사실 등 효행의 구체적인 사실들을 나열하고 있다. 이어 이러한 효행은 고을 사람들의 존경 대상이 되었고, 국가로부터 정려되었음을 밝히는 부분이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효자비를 건립하려 하는 후손들의 요청으로 비문을 작성하게 된 경위와 비석의 건립에 관계한 후손들의 이름을 밝혔다.
[의의와 평가]
전병모와 전술모 형제의 지극한 효행은 하나의 본보기로서 울진 지역 주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그 후손들이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특히 일본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하고 강제 합병된 후에도 효자비의 건립 연대를 조선왕조 개국 522년으로 적고 있어 민족의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