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3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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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越松浦 |
영어의미역 | Wolsongpo Por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302-5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심현용 |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황보천 하구에 있던 조선시대 포구.
[개설]
조선 초기에는 각 도별로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에 의해 기선군(騎船軍: 수군)을 통할하였다. 영진체제(營鎭體制)가 갖춰지면서 각 도의 요새수어처(要塞守禦處)별로 군사 조직이 편성됨에 따라 고려 이래로 두어온 만호(萬戶)에게 외침 방어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458년(세조 4)에 영진체제가 진관체제(鎭管體制)로 바뀌면서 각 도 연해안의 요해처나 북방 내륙의 여러 진에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만호·절제도위(節制都尉) 등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동첨절제사와 절제도위 등은 대개 독진(獨鎭)이 아닌 경우에는 지방 수령이 겸했으나, 만호만은 무장(武將)이 별도로 파견되어 이들이 사실상 일선 요해처의 전담 무장이 되었다.
[형성 및 변천]
평해군은 조선시대에 읍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내려오다가 1413년(태종 13) 지방제가 대대적으로 개편되면서 강원도 삼척도호부의 관할이 되었다. 세종대[1418~1450]에는 양계와 각 도 연변의 군사적 요지가 상긴(上緊)·중긴(中緊)·하긴(下緊)으로 구분될 때 하긴이 되었다.
당시까지 평해군의 지방관은 지군사였으나, 1466년(세조 12)에 군수로 승격되었다. 1466년에 진관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삼척도호부에서 강릉부진관으로 이관되었으며, 월송포에는 수군만호가 배치되었다. 이후 울릉도를 수토(搜討)할 때 수토군이 이곳 월송포에서도 출발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여도비지(輿圖備志)』·『관동읍지(關東邑誌)』 등의 문헌에 월송포진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월송포진은 평해에서 동북쪽으로 7리에 있으며, 1555년(명종 10)에 둘레 489~628척, 높이 6~7척 되는 석축을 쌓아 조성되었다. 이 성에는 수군만호 1명과 수군 400명을 주둔시켰다.
[위치비정/행정구역상의 구분]
월송포진은 평해읍에서 북쪽으로 약 3㎞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부근에는 신혼예식장이 자리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302-5번지에 해당한다. 이곳에는 당시 수군 부대의 성 터였던 포진성이 일부 남아 있으며, 남쪽으로는 논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관련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 평해군 관방 월송포영조에는 “재군동칠리수군만호일인(在郡東七里水軍萬戶一人)”, 『동국여지지』 평해군 월송포만호진조에는 “재군동칠리수군만호일인(在郡東七里水軍萬戶一人)”이라는 기록이 있다. 『여도비지』 평해군 진보 월송포진조에는 “치동북칠리석축주육백이십팔척고육척수군만호일원군총사백명진창(治東北七里石築周六百二十八尺高六尺水軍萬戶一員軍摠四百名鎭倉)”이라는 기록이 있다.
『대동지지』 평해군 진보 월송포진조에는 “동북칠리성주육백이십팔척수군만호일원(東北七里城周六百二十八尺水軍萬戶一員)”이라는 기록이 있다. 『관동읍지』 평해군 진보 월송포만호진조에는 “포재군동칠리가정을묘석성주회사백팔십구척고칠척유수군사백명무전선(浦在郡東七里嘉靖乙卯石城周回四百八十九尺高七尺有水軍四百名無戰船)”이라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