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22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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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琫準將軍被逮-押送路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신영 |
[정의]
2003년 순창군에서 조성한 동학 농민 혁명의 지도자 전봉준 장군이 체포되어 압송된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피노 마을에서 구림면 금창리 금상 마을까지의 길.
[개설]
전주성을 점령하고 기세를 올리던 동학군은 조선 정부가 청에 군대를 요청하고 이에 일본군까지 따라 조선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일본은 청을 공격하여 청일 전쟁을 일으키고 예상을 뒤엎고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일본이 곧 조선을 집어삼킬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자 동학군은 다시 대열을 정비하여 전쟁에 나섰다. 그러나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정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전봉준은 남쪽으로 피난을 하여 순창 피노리에 도착하였다.
전봉준이 피노리를 선택한 것은 자신이 고부 접주로 활동할 당시 집사 업무를 맡아보던 김경천(金敬天)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상금을 탐낸 김경천은 민보군을 조직하고 있던 전라 감영 퇴교(全羅監營退校) 한신현(韓信賢), 김영철(金永澈), 정창욱(丁昌昱) 등과 함께 전봉준이 묵고 있는 주막을 포위하고, 잔혹한 몽둥이질을 통해 전봉준을 잡아 공회당에 가둔 뒤 관군에 인계하였다. 이후 한신현은 그 댓가로 현상금 1천냥을 받고, 황해도 금천 군수(金川郡守)에 제수되었으며, 김영철은 300냥, 정창욱은 200냥, 마을사람 9명이 200냥의 현상금을 받았다고 한다.
순창에 주둔하고 있던 관군인 교도대(敎導隊)는 1894년 12월 2일에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피노 마을∼용전리 묵산마을∼신광사재∼ 구림면 금창리 금상 마을로 압송로를 정하여 순창 관아로 끌고 갔는데, 이는 전봉준을 따르는 동학 농민군과 일반 농민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전주의 전라 감영으로 압송하기 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순창 관아에서 12월 7일 담양을 경유하여 나주로 압송하였다. 나주에서 1895년 1월 5일출발하여 1월 24일 서울 주재 일본 영사관에 인도되었다. 전봉준은 몇 차례 심문을 거쳐 2월 3일 법무 아문으로 인도되었고, 재판을 거쳐 3월 30일 최경선, 손화중, 김덕명, 성두한과 함께 사형을 당했다.
[건립 경위]
전봉준 장군 피체 및 압송로는 녹두장군 전봉준관과 함께 개항기 동학 농민 혁명의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 장군이 일본군에게 붙잡혀 간 현장을 재현하여 우리 역사를 바로 알리기 위하여 조성되었다. 순창군은 2002년 3월∼2003년 6월에 관광 자원 개발 사업비 7억 원을 투자하여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피노 마을∼구림면 금창리 금상 마을 압송로 구간의 길과 등산로 3.83㎞를 정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