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999 |
---|---|
한자 | 徐稜 |
이칭/별칭 | 대방(大方),송암(松庵),절효(節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종교/유교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최범호 |
추모 시기/일시 | 1578년 - 서릉 정려비 건립 |
---|---|
추모 시기/일시 | 1752년 - 서릉 월산사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948년 - 서릉 화남사에 배향 |
출생지 | 서릉 출생지 - 전라남도 장성군 |
사당|배향지 | 월산사 -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대치리 |
사당|배향지 | 화남사 -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 115 |
정려비 | 서릉 정려비 - 전라남도 장성군 북일면 박산리 |
성격 | 문관|효자 |
성별 | 남 |
본관 | 장성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 화남사에 배향된 고려 후기의 문관이자 효자.
[가계]
본관은 장성(長城). 자는 대방(大方), 호는 송암(松庵).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11세손으로, 아버지는 서희팔(徐希八)이다. 아들은 대장군(大將軍) 서준(徐俊)이고, 손자는 상장군(上將軍) 서민경(徐敏敬)이다.
[활동 사항]
서릉(徐稜)은 장성현(長城縣)[지금의 전라남도 장성군] 사람으로 고려 고종 때의 문관이다. 스무 살에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으며, 나라에서 식읍(食邑)을 하사 받고 장성을 본관으로 삼아 장성 서씨의 시조가 되었다.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나 홀로 계신 어머니가 병이 들자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서릉의 효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1245년(고종 32)에 모친의 목에 악창이 나서 위중하게 되자 의원을 청하여 진찰하게 하니 의원이 살아 있는 개구리가 아니면 고치기 어렵다고 말하였다. 서릉이 “지금 같은 엄동설한에 살아 있는 개구리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필시 어머니의 병은 고치지 못하겠구나.” 하고 소리쳐 울자 의원이 “비록 산 개구리는 없으나 우선 다른 처방으로 약을 지어 시험해 봅시다.” 하고 위로하였다. 의원이 두 팔을 걷고 나서서 큰 나무 아래에다 냄비를 걸고 불을 지펴 약을 볶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나무 위에서 솥 안에 떨어지니 바로 살아 있는 개구리였다.
의원이 “그대의 지극한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하늘이 선물을 내려 주었으니 이 약을 쓰기만 하면 그대의 어머니는 반드시 나을 것이오.” 하고 약을 만들어 악창에 붙이자 과연 나았다. 같은 고을 사람 대장군 서희(徐曦)가 매번 이 일을 이야기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한다. 서릉은 고향 향리에 초당(草堂)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유교적 생활 습관과 덕목을 제시한 「거가 십훈(居家十訓)」을 남겨 후세의 지침이 되게 하였다.
「거가 십훈」은 부식삼강(扶植三綱)[삼강을 바로 세워 지킬 것], 돈서오륜(惇敍五倫)[오륜을 돈독하게 하여 질서를 세울 것], 관이어하(寬以御下)[너그러운 마음으로 아랫사람을 대할 것, 예이상사(禮以事上)[예로써 윗사람을 섬길 것], 임상치애(臨喪致哀)[상을 당하여서는 슬픔을 다할 것], 당제치경(當祭致敬)[제사는 공경을 다할 것], 지심이공(持心以公)[마음가짐은 공정하게 할 것], 처사이의(處事以義)[일을 처리할 때는 올바르게 할 것], 교자이정(敎子以正)[자식은 바르게 교육시킬 것], 대인이서(待人以恕)[남을 대할 때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상훈과 추모]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효자로 꼽히는 서릉의 효행 행적은 『고려사(高麗史)』 열전 효우(孝友) 편과 세종 때 편찬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기록되어 있다. 고종이 절효(節孝)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1578년(선조 11)에 효자 서릉의 효행을 표창하기 위하여 전라남도 장성군 북일면 박산리에 서릉 정려비[전라남도 유형 문화재 제162호]를 세웠다.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에 있었던 모암 서원(慕岩書院)[지금의 칠현 유적지]에 배향되었다. 모암 서원은 1587년(선조 20)에 창건한 서원으로, 처음에는 모암사(慕岩祠)라 하고 서릉을 주벽(主壁)으로 배향하였는데,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1752년(영조 28) 사우를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대치리 반월산 기슭에 중건하여 월산사(月山祠)라 하고 서릉을 주벽으로 배향하였다. 1948년에는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에 사우를 건립하여 화남사(華南祠)라 하고 서릉을 주벽으로 하고 서숭로(徐崇老), 서영우(徐永佑)를 배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