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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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汝筠 |
이칭/별칭 | 군직(君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훈 |
출생 시기/일시 | 1548년 - 양여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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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36년 - 양여균 병자호란 때 의병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636년 - 양여균 사망 |
출생지 | 양여균 출생지 - 전라북도 순창군 |
묘소 | 양여균 묘소 - 전라북도 순창군 인계면 가성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본관 | 남원 |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순창 출신의 거부(巨富)이자 의병.
[가계]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군직(君直). 양사보(楊思輔)의 8세손으로, 아버지는 양시정(楊時鼎)이다. 부인은 유현의 딸 문화 유씨이다. 아들은 양운거(楊雲擧)이다.
[활동 사항]
양여균(楊汝筠)[1548~1636]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솔 300명을 의병으로 거느리고 쌀 300석과 함께 도성으로 출정하였다. 그러나 굴욕적인 강화 조약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군량미로 쾌척한 쌀 300석을 조정에 헌납한 후 가솔들을 인솔하여 귀향하였다. 조정에서는 양여균의 행적을 치하하기 위하여 통정대부 호조 참의를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아들 양운거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잘 관리하여 더욱 큰 부를 쌓았고, 나라와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재산을 내놓았다. 1661년(현종 2) 1월 『현종실록(顯宗實錄)』의 기록에 의하면 “순창인(淳昌人) 양운거가 일찍이 몇백 석의 미곡을 관에 납부했으며, 또 흉년이 들자 자기 개인 저축을 흩어 기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이에 힘입어 온전히 살아난 자가 자못 많습니다. 지금 만약 재물을 희사하여 빈민을 구제한 사람에게 상을 주던 옛날의 제도를 시행하기로 한다면 운거에게 상을 줌이 마땅합니다.”라는 보고에 따라 임금이 관직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양운거는 대대로 호남에 살았는데, 재산이 넉넉하여 백만 장자라는 명성이 있었다. 효종 때도 일찍이 운거에게 가선(嘉善)의 품계를 제수했으나 받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와서 사옹원 참봉에 제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묘소]
전라북도 순창군 인계면 가성리[차치 안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