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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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有謙 |
이칭/별칭 | 수익(受益),만회(晩悔)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범호 |
출생 시기/일시 | 1586년 - 이유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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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23년 - 이유겸 신령 현감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39년 - 이유겸 순창 군수에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63년 12월 20일 - 이유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88년 - 이유겸 문봉 서원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788년 - 이유겸 지계 서원에 배향 |
사당|배향지 | 문봉 서원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문봉동 |
사당|배향지 | 지계 서원 -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지북리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우봉 |
대표 관직 | 호조 참의 |
[정의]
조선 후기 순창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순창의 지계 서원에 배향된 문신.
[가계]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수익(受益), 호는 만회(晩悔). 고조할아버지는 이승건(李承健), 증조할아버지는 이심(李諶), 할아버지는 이지신(李之信)이다. 아버지는 이길(李劼)이고,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李氏)이다.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서 윤홍유(尹弘裕)의 딸이다. 5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이유겸(李有謙)[1586~1663]은 조수륜(趙守倫)과 성혼(成渾)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김장생(金長生)을 스승으로 섬겼다. 재능이 많고 성격은 강직하며 우애가 깊었다. 광해군 때 조수륜이 화를 당하여 죽었으나 아무도 아는 체하지 않자 친히 염습(殮襲)·교금(絞衾)을 예식대로 집행하였고,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폐비시키고자 하는 것에 대한 잘못을 직언하여 죄를 입게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뒤 유일(遺逸)[조선 시대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찾아 천거하는 인재 등용 정책]로서 6품직인 신령 현감에 제수되었다. 신령 현감 재임시 모략을 받자 백성들이 자진해서 포(布)를 상납하여 죄를 풀고자 할 정도로 정사를 잘 처리하였다. 그 뒤 공조 좌랑·함흥 판관 등을 지냈는데, 백성을 천시하지 않고 학문을 권하고 교훈을 밝혔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패배하였다. 1639년(인조 17)에 순창 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네 번 태복시(太僕寺)에 들어가 판관·내승(內乘)이 되었고 두 번 첨정(僉正)이 되었다. 대구 부사, 성주 목사, 호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지방관으로 재임하였을 때 향음주례(鄕飮酒禮)[온 고을의 유생이 모여 향약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던 일]를 행하고 기영회(耆英會)를 만드는 등 향촌 교화에 힘썼다. 1663년(현종 4) 12월 20일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천리 샘골에 있다. 신도비는 송시열(宋時烈)이 글을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민유중(閔維重)이 전(篆)[옛 글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곳을 해설하여 지은이의 뜻을 밝히거나 자신의 견해를 써 넣은 것]을 하였다.
[상훈과 추모]
1688년(숙종 14) 고양의 문봉 서원(文峯書院), 1788년(정조 12) 순창의 지계 서원(芝溪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