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8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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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蘆沙集 |
이칭/별칭 | 『노사 선생 문집(蘆沙先生文集)』,『노사 선생 전집(蘆沙先生全集)』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손앵화 |
[정의]
전라북도 순창 출신의 조선 후기 유학자 기정진의 문집.
[저자]
기정진(奇正鎭)[1798~1879]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위청 척사론자이다.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이며, 순창군 복흥면 동산리 조동 마을에서 아버지 기재우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순창에서는 기정진 조모의 묏자리가 풍수지리상 길지라고 하는 황앵탁목(黃鶯啄木)의 혈이며, 이에 따라 기정진이 대학자가 되었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1831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강릉 참봉(康陵參奉), 현릉 참봉(顯陵參奉)을 지냈다. 이후 여러 번의 천거에도 불구하고 끝내 관직에 나가지 않고 문인들과 함께 독창적인 성리학의 이론 체계를 수립하는 데 힘썼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 세력의 침략에 대비하고 민족 주체성을 확립할 것을 주장하는 「병인소(丙寅疏)」를 올렸다. 1877년 나이 많은 사람을 대우하여 내리는 벼슬인 우로전(優老典)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가 주어졌다. 그해에 장성 하리 월송[지금의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 지역]으로 이사하여 담대헌(澹對軒)이라는 정사를 짓고 문인들과 함께 거처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항로(李恒老)의 화서 학파(華西學派), 전우(田愚)의 간재 학파(艮齋學派), 송병선(宋秉璿)의 연재 학파(淵齋學派)와 함께 조선 말기 기호 학파(畿湖學派)의 큰 줄기를 형성하였다. 대표적인 성리학 저술로는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나오는 ‘정(定)’ 자에 대한 해설인 「정자설(定字說)」, 사단 칠정(四端七情)을 논한 『우기(偶記)』, 이기(理氣)에 대해 평론한 「이통설(理通說)」, 그의 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납량사의(納凉私議)」 등이 있다. 1927년 전라남도 장성군의 고산 서원(高山書院)에 봉안되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편찬/간행 경위]
『노사 선생 문집(蘆沙先生文集)』 혹은 『노사 선생 전집(蘆沙先生全集)』이라고도 불리는 『노사집(蘆沙集)』은 세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다. 초간본은 손자인 기우만(奇宇萬)이 1883년 봄에 장성의 담대헌(澹對軒)에서 목활자로 간행하였는데, 목록 2권 1책, 원집(原集) 22권 10책, 합 11책으로 되어 있다. 그 후 1898년 담대헌에서 기우만의 주도로 초간본과 동일한 활자로 문집을 중간(重刊)하고, 여기에 연보(年譜)와 문인인 조성가(趙性家)가 지은 행장(行狀)을 부록 2권으로 수록하였다.
1902년 4월에 이루어진 삼간(三刊)은 단성의 신안 정사(新安精舍)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중간본에 시문과 서간문 등을 증보하여 28권 15책으로 재편하였고, 부록의 첫머리에 고종이 내린 제문을 수록하였으며, 말미에는 최익현(崔益鉉)이 쓴 신도비명을 추가하였다. 부록의 끝에는 ‘임인춘 단성 신안사 개간(壬寅春丹城新安社開刊)’이라는 간기(刊記)가 있다. 서문과 발문은 없다.
[형태/서지]
『노사집』은 원집(原集) 28권 15책, 부록(附錄) 2권 1책, 도합 30권 16책의 목판본이다. 판식은 사주 쌍변(四周雙邊)[책장의 네 모서리 모두 두 줄로 되어 있는 테두리]으로 상하 이엽 화문 어미(上下二葉花紋魚尾)이다. 반곽(半郭)의 크기는 20.5×15.9㎝이다. 1면 10행에 1행의 자수는 20자이다. 표제와 판심제는 모두 ‘노사집(蘆沙集)’이다.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권1~2에는 시(詩) 272제(題)가 대략 연대순으로 실려 있다. 문집 전체의 분량에 비해 시의 분량은 적은 편이고, 교유하는 인물 및 문생들과 주고받은 차운시(次韻詩), 증시(贈詩)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권3은 소(疏) 3편, 사장(辭狀) 1편, 책(策) 1편이다. 「병인소」는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고 조정에서 서양과 화의(和議)하자는 논의가 일어나자 비분강개하여 올린 상소이다. 1862년에 지은 「임술 의책(壬戌擬策)」은 삼남(三南)의 민란에 대한 대책으로 삼정(三政) 개혁을 주장한 글인데, 결국 올리지는 못하였다.
권4~15는 서(書) 696편으로 문집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선배와 존장자에 대한 편지를 먼저 싣고, 벗·문인·숙질들에게 보내는 편지 순서로 편차되어 있다. 이 중 권7에 수록된 이봉섭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해 논하였으며, 완산 의회소에 보낸 편지는 병인양요에 대응하여 의거를 촉구하는 완산 의회소 선비들에게 때를 기다려 움직여야 한다고 답한 것이다. 권9의 조성가에게 주는 편지에서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학설을 주기론(主氣論)으로 단정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할 것을 조언하였는데, 이 글이 「외필(猥筆)」을 짓는 계기가 된다. 권10의 정하원(鄭河源)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이(理)와 기(氣)는 상호 발(發)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권15에는 숙질들과 손자에게 보내는 편지만을 모아 놓았다.
권16에는 잡저(雜著) 36편이 실려 있다. 여기에 저자의 3대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통설(理通說)」, 「납량사의(納凉私議)」, 「외필(猥筆)」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1853년에 지은 「이통설」은 권우인(權宇仁)이 율곡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오해하여 그 본지를 어지럽히자 지어 준 글이다. 「납량사의」는 이일원론(理一元的) 관점에서 주리론을 전개하고 있다. 「외필」은 저자의 저술 가운데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글로서 기(氣)의 자발성을 비판하고 근원적인 이(理)의 주재성을 강조하였다.
권17~20에는 서(序) 159편이 실려 있다. 족보서(族譜序)가 70여 개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문집서(文集序)가 뒤를 잇는다. 권21~23은 기(記)로서 모두 88편이다. 「고암 서원 중수기(考巖書院重修記)」는 송시열을 배향한 전라북도 정읍 고암 서원의 중수에 대한 기문(記文)이며, 「풍영루 중건기(風詠樓重建記)」는 정여창을 배향한 경상남도 함양 남계 서원의 풍영루 중건에 대한 기문이다.
권24에는 86편의 발문이 실려 있다. 문집이나 실기, 행장 등에 대한 발이 주를 이룬다. 권25는 잠(箴) 1편, 명(銘) 1편, 사(辭) 5편, 상량문 4편, 격문 1편, 축문 5편, 제문 7편이다. 권26은 비(碑) 4편, 묘갈명 10편, 묘지명 6편이다. 권27에는 묘표 34편, 권28에는 행장 11편, 전(傳) 2편, 유사(遺事) 1편이 실려 있다. 부록의 권수(卷首)에는 고종이 내린 사제문(賜祭文)이 실려 있고, 부록 권1에는 연보, 부록 권2에는 조성가가 1892년에 지은 행장과 최익현이 1901년에 지은 신도비명이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노사집』은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논쟁을 극복하고 이일분수(理一分殊)의 논리에 의해 독창적인 이(理)의 철학 체계를 수립한 기정진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으며, 이기 학설(理氣學說)의 연구에 좋은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