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6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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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淳昌靑年同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숙정 |
[정의]
1924년 전라북도 순창 지역에서 설립된 청년 단체.
[개설]
순창 청년 동맹은 조선 청년을 대동단결시키기 위하여 발기한 조선 청년 동맹의 지부이다. 순창 청년회가 변모되어 창립된 사회주의적 색깔을 띤 단체로 신간회를 지지하였다.
[변천]
1919년 3·1 운동 이후 각 지역마다 설립된 청년회는 노동자·농민 운동의 증가와 함께 사회주의 성향의 청년 단체의 등장으로 변모하게 된다. 즉 1923년 중반 이후 세력이 급속히 약화된 청년회 연합회 등이 계급 운동에 기초한 전국적 청년 단체 결성에 합의하여 청년 동맹이 등장하게 된다.
이 흐름으로 1920년 6월 20일 설립된 순창 청년회 또한 1924년 조선 청년 동맹에 가입하게 되었다. 순창 청년회와 순창 청년 동맹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신간회이다. 1927년 2월 신간회가 결성되고 5월 조선 사회 단체 중앙 협의회에서 조선 운동의 방향 전환론이 정당성을 획득하면서 청년 운동에서 민족 문제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이에 각 청년 동맹들은 신간회와의 연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고, 순창 청년 동맹도 매 회의마다 신간회 지지에 대한 건을 논의하곤 하였다.
순창 청년 동맹은 사회주의적인 색깔도 띠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7년 10월 8일 조선 공산당 사건 공판의 공개 금지에 대한 항의문을 총독부 당국과 경성 지방 법원장에게 보내기도 했으며, 노동 운동과 형평 운동에 많은 관심을 쏟기도 하였다. 결국 1931년 4월 28일 순창 경찰서에서 순창 청년 동맹 집행 위원을 소환하여 5월 1일 노동절을 전후한 삼 일 동안 두 명 이상 모이는 것을 엄금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의 순창 청년 동맹의 활동에 대해서는 기록을 찾기 어렵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순창 청년 동맹은 지부를 여러 개로 나누어 활동하였다. 정치부, 서무부, 교양부, 조사부가 있었으며, 검사 위원이라는 것도 있었다. 1927년 당시 임원진은 정치부 신진우(申鎭雨)·이태환(李泰煥), 서무부 이정팔(李廷八)·성호준(成湖俊)·국진섭(鞠眞燮)·이병무(李秉茂), 교양부 권용섭(權龍燮)·신진우(申鎭雨), 조사부 이은규(李銀揆)·오정운(吳正雲), 검사 위원 신진우(申鎭雨)·이태환(李泰煥) 등으로 편성되었다.
주로 신간회 지지 건과 월 연금 및 의연금 징수 건에 대해 논의하는 회의를 자주 가졌다. 월연금 및 의연금 징수에 대해 논의하는 회의를 많이 한 것으로 보아 동맹 운영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순창 청년 동맹은 야학 설치와 독서회 활동 등 순창 면민을 계몽하기 위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순창 청년 동맹은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위하여 면 단위의 금과 지부와 유등 지부, 인계 지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현황]
1930년에 들어오면서 청년 운동의 새로운 조직 방침이 점차 확산되어 가는 한편 청년 대중의 저항이 첨예화되고 일제의 탄압 또한 강화되는 정세 속에서 일부 사회주의자들 속에서 합법적인 영역 내 활동에 주력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합법 운동 노선은 많은 청년 대중의 신뢰를 상실했고, 1931년부터 본격적으로 청년 동맹 해체 문제가 불거져 나와 청년 운동은 지역적 근거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청년 단체 지도 방침에 따라 관변 조직인 청년단을 결성되게 되었다. 순창 청년 동맹도 1931년 노동절을 앞두고 집회가 금지되었다는 기록 외에는 이후 활동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의의와 평가]
순창 청년 동맹은 순창 청년회가 자발적으로 변모한 것으로 신간회와의 연계 활동을 통해 사회 운동을 계속했으며, 파벌 주의자들을 경계하고 당시 유행했던 자치 주의자 및 기회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경계의 시선을 보였다. 이런 점에서 순창 청년 동맹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