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1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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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Demolition and Migration Variations Played on the Stage of Development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양훈도 |
[개설]
1970년대까지 한적한 교외 지역이었던 시흥은 1977년 서울의 철거민들이 복음자리마을을 조성하면서 철거 이주민들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는 한편 정부의 도시 빈민 주거 정책 부재를 실감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 초부터 복음자리마을 옆에 들어서기 시작한 신천동 83번지 무허가 판자촌은 1993년 화재 사건을 계기로 도시 개발에 따르는 철거 투쟁이라는 그림자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빈민 주거 정책 부재와 복음자리]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시흥군 소래면, 수암면, 군자면[지금의 시흥시]은 한적한 교외 지역이었다. 호조벌로 대표되는 소래면 매화리[지금의 시흥시 매화동] 일대를 중심으로 시흥 지역의 동쪽은 논과 밭, 야산과 구릉지로 형성된 농촌이었고, 서쪽 바닷가는 군자염전과 소래염전이 드넓게 펼쳐진 염전 지대와 포리·오이도·월곶 등 포구를 중심으로 어업에 종사하는 고장이었다.
1977년 3월 당시 소래면 신천리[지금의 시흥시 신천동] 33번지 과수원 땅 3만 2000평[10만 5785㎡]에 들어선 비상 천막촌은 시흥의 풍경을 바꾸어 놓는 신호탄이었다. 비상 천막촌은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동을 중심으로 양남동·문래동 등지의 철거민들이 집단 이주하기 위해 세운 임시 거처였다. 1977년 6월 비상 천막촌 사람들은 기공식을 갖고 복음자리마을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서울의 철거민들이 시흥 지역으로 집단 이주하여 살 길을 찾게 된 까닭은 당시 정부와 서울시의 주거 정책, 특히 빈민 주거 정책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와 서울시는 1960년대부터 인구의 서울 집중을 막고 도시를 정비한다는 구실로 서울 곳곳에 오래전부터 자리 잡은 판자촌을 외곽으로 밀어내는 데 급급하였다. 경기도 광주대단지(廣州大團地)[지금의 경기도 성남시]가 대표적이다. 1968년 서울시는 당시 광주군 야산 지역에 서울의 철거민과 이주민을 집단 이주시켰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결국 1971년 광주대단지 주민들이 집단 반발하여 공권력을 무력화시키고 도시를 장악하는 광주대단지 사건이 터졌다.
시흥 복음자리마을의 형성은 정부와 서울시가 대책 없이 서울 양평동 등지의 판자촌을 철거하기로 하자, 제정구(諸廷坵)와 정일우(鄭日祐)[John Vincent Daly] 신부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집단 이주를 계획하고 실행한 자구책이었다. 복음자리마을에 이어 1979년 소래면 신천리에 들어선 한독마을도 서울시 당산동·신림동·시흥동·봉천동 등 9개 지역 철거민들이 이주해 온 곳이다. 1985년 세워진 목화마을 역시 서울 목동 철거민들의 이주지다. 목동 신시가지 개발로 살 곳을 잃은 철거민들은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일부가 시흥으로 이주를 택했다. 정부의 도시 빈민 주거 정책 부재가 철거민들을 시흥 지역으로 밀어낸 것이다.
[신천동 83번지의 형성]
복음자리마을은 제정구와 정일우의 노력과 이주민들의 각성으로 점차 공동체로서 모습을 갖춰 나갔다. 그런데 1980년대 초부터 복음자리마을과 길 하나 건너인 신천동 83번지 일대에 서울과 인천, 경기도 인근 도시 등에서 살 곳이 없어진 사람들이 무허가 판자촌을 짓고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신천동 83번지 무허가 판자촌 형성은 당국의 주거 정책 부재가 초래한 철거·이주 투쟁이 시흥으로도 번지는 결정적 계기였다.
신천동 83번지는 원래 김원길의 포도밭이었던 곳이다. 김원길이 1978년 작고한 이후 그의 유언에 따라 세워진 장학회와 그의 유족 간에 소유권을 둘러싼 법정 공방이 벌어졌다. 재판이 진행되는 사이 신천동 83번지는 임자 없는 땅으로 여겨지면서 각지의 도시 빈민들이 모여들어 무허가 판자촌으로 변해 갔던 것이다. 더구나 일단 가건물이라도 세우고 나중에 보상을 요구할 속셈으로 투기꾼까지 끼어들면서 신천동 83번지 무허가 건물은 부쩍 늘어났다. 1990년대 들어서는 하룻밤에 10여 채가 들어서는 희한한 풍경까지 벌어졌다.
1990년 5월 통계를 보면 신천동 83번지 무허가 판자촌에는 836가구가 거주하였다. 주택 751개 동, 점포 61개 동, 공장 6개 동, 교회 7개 동, 절 1개 동이다. 신천동 83번지 무허가 판자촌의 거주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집은 평균 방 한 칸, 부엌 한 칸 규모였다. 당연히 집마다 화장실을 갖출 수 없어 공동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고, 전기와 수도도 들어오지 않았다. 전기는 외부의 선을 끌어다가 1회선을 10~20가구가 공동으로 썼고, 수도도 마을을 통틀어 소화전에서 끌어온 수도선 2개 선이 고작이었다. 주민들은 대부분 건설 일용직 인부거나 영세 자영업자였다.
[화재 사건과 철거 반대 투쟁]
1993년 5월 신천동 83번지 무허가 판자촌에는 517가구 1,280여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1990년보다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큰 마을 규모였다. 신천동 83번지 무허가 판자촌에서는 화재 사건이 빈발하였다. 1992년 8월에 두 차례, 1993년 1월에도 한 차례 불이 났다. 화재 사건은 무허가 판자촌 주민들을 동요시키는 촉매제였다. 1993년 5월에도 큰 불이 났다. 2명이 사망하고, 가옥 파손만 200여 채에 이재민 800여 명이 발생한 대형 화재였다. 경찰은 누전에 의한 화재라고 추정했지만, 신천동 83번지 주민들은 재개발을 위한 고의적 방화를 의심하였다. 이 무렵에는 소유권 소송이 마무리되고 신천동 83번지 재개발이 논의되는 시기였다. 소실된 집의 재건축은 불허되었다. 주민들은 각 행정기관과 정당에 진상 규명과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고, 숨진 사람들의 위령제를 지낸 다음 당시 민주당사에 가서 농성을 벌이기도 하였다.
주민들은 이주 보상비와 영구 임대주택 건설 및 입주권을 요구했으나 땅 소유주가 된 하정육영장학재단과 시공사인 (주)청보H&C는 이주 보상비만 줄 수 있다고 통보하였다. 주민들은 자구책으로 자체 재개발 조합을 구상하고 추진했으나 막대한 비용 문제로 결국 포기하였다. 2003년부터 신천동 83번지 무허가 판자촌 철거와 재개발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시공사측은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강제 철거를 강행하려고 하였다.
일부 주민은 이주 보상비를 받고 개별 이주했으나, 다수 주민은 철거에 완강히 저항하였다. 이주를 거부한 주민들은 주거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주거권연합]과 연대를 모색하고, 시민 단체와 종교 단체의 지원을 받으면서 철거 반대 투쟁을 계속했다.
강제 철거는 2004년 하반기부터 시작되었다. 강제 철거 과정에서 2004년 11월 주민 폭행 사건이 벌어졌다. 철거 반대 주민들은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 동절기 강제 철거 중단, 최소한의 주거권 보장을 요구하였다. 시공사는 겨울철 강제 철거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약속을 뒤집고 2004년 12월 31일 굴삭기 3대를 동원해 20여 채를 헐어냈다. 주민들은 시흥시청 앞에서 한 달간 항의 집회를 갖고 대책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였다.
2005년 신천동 83번지 무허가 판자촌 철거를 둘러싼 갈등이 증폭되자 시민 단체와 종교 단체, 정당이 불법 강제 철거 방지와 폭력 사태 대응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시공사의 압박과 설득이 계속되면서 반대 주민은 20여 세대로 줄어들었다. 끝까지 철거에 저항했던 주민들은 2005년 3월 주민자치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대응하려 했지만, 2005년 6월 16일 주민자치위원회 사무실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철거되었다. 2005년 8월 합의로 철거 반대 주민 20여 세대는 이주비를 받고 신천동 83번지를 떠났다. 하지만 신천동 83번지에서 철거된 주민들은 마땅히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시흥시 대야동 156번지 그린벨트 내에 컨테이너로 숙소를 만들고 옮겨 갔다. 대야동 컨테이너 촌 역시 그린벨트 내여서 그린벨트 내 무허가 행위를 단속해야 하는 시흥시 당국과 철거를 둘러싼 마찰을 수년 동안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시흥시의 개발과 이주 문제]
신천동 83번지 무허가 판자촌처럼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1990년대와 2000년대에도 시흥시가 팽창하고 개발되는 과정에서 철거와 이주를 둘러싸고 크고 작은 갈등이 계속됐다. 한적한 교외였던 시흥시 곳곳이 개발되면서 빚어진 일들이다. 1990년대 시화국가산업단지[시흥공단] 건설 과정에서도 이주 보상비와 이주 대책을 보장해 달라고 당국에 항의하는 주민들이 줄을 이었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시흥시의 면모는 급격히 달라졌다. 시화지구 개발 외에도 은행지구, 연성1·2지구, 월곶지구 등의 택지 개발 사업이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또한 제2경인고속도로, 서해안고속도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 전철 4호선이 오이도까지 연결되기도 하였다. 시흥시 내 도로도 여러 곳 확장되었다. 2000년대 들어 개발은 한층 가속되었다. 2004년에는 장현동 일대와 목감동 일대가 택지 개발 지구로 지정되었다. 2010년에는 과림동이 광명·시흥 보금자리 주택 지구, 은행동·대야동·계수동·안현동이 시흥 은계 보금자리 주택단지로 각각 지정되었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로가 개설된다는 것은 해당 부지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 떠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시 개발 과정에서 몇 백 년을 이어온 마을들이 사라지기도 한다. 철거와 이주를 둘러싼 갈등은 개발에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천동 83번지 무허가 판자촌 철거 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갈 곳 없는 서민들을 대책 없이 살던 집에서 몰아내는 방식의 개발은 비극을 낳게 마련이다. 도시가 발전하면서 나타나는 빛과 그림자의 일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