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1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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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喪禮 |
영어공식명칭 | Funeral Rites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덕묵 |
[정의]
경기도 시흥 지역에서 사람이 죽은 후 장례를 지내기까지 수반되는 의례.
[개설]
상례(喪禮)는 일생 통과 의례 중의 하나다. 임종(臨終) 전에서 탈상(脫喪)까지의 과정은 상례의 예법에 따라 행해진다. 상례는 효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효를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 사회에서 다른 의례에 비해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오늘날 시흥 지역의 상례는 대부분 현대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전통 방식에 따라 상례를 하던 가정이 더러 있었다.
[절차]
아래의 상례 절차는 1999년 3월 6일 시흥시 포동에서 조사된 내용을 기술한 것이다. 제보자는 이영규로 당시 81세이며 본관은 전주이고 포동에서 10대째 거주하고 있다. 10대조 할아버지는 황해도 봉산군수를 지냈으며 포동에 그 묘소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영규의 진술을 통해 포동 전주 이씨(全州李氏) 집안의 장례 절차를 엿볼 수 있다.
운명(殞命)하면 먼저 눈과 입을 막고[이영규 집안에서는 솜으로 얼굴의 구멍을 막지는 않았다고 함.] 수시(收屍)[시신의 얼굴이나 팔다리 등을 바로잡는 일]를 거둔다. 즉, 망자의 손을 중앙으로 모아 팔꿈치를 묶고 손바닥을 묶고 무릎을 묶고 발목을 묶고 발끝을 묶는다. 다시 세로로 발끝에서 손까지 연결하여 묶어 발끝이 세워지게 한다. 수시를 거둔 후 망자의 옷을 지붕에 얹고 옷 찾아가라고 복(復)을 하고 '사자상[死神桌]’을 차려 놓는다. 망자를 칠성판[한 자짜리 넓이의 망자 키만큼 길게 자른 송판]에 올린 후, 칠성판과 시신을 상중하(上中下)로 3매를 묶는다.
다음 날 한밤중[주로 새벽 2~3시]에 염(殮)을 한다. 베로 만든 망자용 얇은 이불을 깔고 시신을 올린 후 향수로 손발과 얼굴을 씻기고[집안에 따라서는 상체까지 닦는 집도 있음.] 저고리를 입히고, 입에 쌀을 넣고 “백석이요 천석이요 만석이요.”[다른 지역에서는 상주들이 이것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영규 집안에서는 염하는 사람이 이것도 함.] 한 후 면모(面帽)로 얼굴을 덮고 끈을 매고, 악수(幄手)[손 덮개]로 손을 매고, 가루매[망자의 시신을 싸고 묶기 편리하게 넓은 베를 좌우 7폭으로 늘어놓고 7폭을 다시 3매씩 되게 하여 좌우 모두 합해 42매가 되도록 한 것]를 펼쳐 놓고, 그 위에 장매(長-)[시신을 세로로 묶기 위해 베의 양쪽 끝부분을 3폭으로 나누어 놓은 것]를 올려 놓고 시신을 올린 후, 장매를 묶고 가루매를 묶는다.
관 안에 소렴금(小殮衾)[앏은 베]을 깔고 창호지를 접은 베개를 놓고 시신을 넣은 후, 소렴금으로 시신을 싼다. 이때는 소렴금을 묶지 않고 덮기만 한다. 이때 시신 옆에 망자의 손톱, 발톱을 넣은 주머니를 넣어 발 옆에 두는 집안도 있으나 이영규 집안에서는 하지 않는다. 시신이 움직이지 않게 보관지[창호지로 짚이나 줄 등을 싼 것]를 넣고 관 뚜껑을 닫는다. 결관바(結棺-)를 5매 또는 7매로 관을 묶어 이 끈을 잡고 관을 들기에 편리하도록 만든다. 관을 윗목에 놓고 병풍으로 가린 후 병풍 위에 영정을 걸쳐 놓고 상을 차린다. 상 위에는 가주(假主)[죽은 사람의 이름을 쓰고 창호지 끈으로 중간을 매고 그 윗부분에 상(上) 자를 써 놓은 것]를 올려놓고, 상 위에는 술[막걸리나 약주, 소주는 안 됨.]과 북어포를 올려놓는다. 그리고 초와 향을 피운다.
상주(喪主)와 복인(服人)[일 년이 안 되게 상복(喪服)을 입는 사람]들은 모두 상복을 입고 성복제(成服祭)를 지낸다. 보통 염습(殮襲)은 새벽 2~3시에 하고 아침에 성복제를 지내며, 삼일장은 죽은 지 이튿날 염을 하고 5일장은 삼일째 날에 한다. 성복제는 망자가 죽은 후 처음 지내는 제사로 이때는 축문은 읽지 않는다. 이때의 제수(祭需)는 일반 제사 때와 같다. 성복제 이후 아침과 저녁에 상식(上食)[망자의 끼니]을 올린다. 상주들은 영좌(靈座)[영위(靈位)를 모시어 놓은 자리] 오른쪽에 지팡이를 짚고 짚으로 만든 자리를 깔고 곡(哭)을 하고 문상객을 받는다. 한편 타 지역과는 달리 여상주들이 곡을 할 때 지팡이를 짚지 않고 '박달이'라고 하는 짚베개를 놓고 곡을 하는 특징이 있다.
상여는 출상(出喪)하는 날 아침에 가지고 와서 꾸미고 관을 올린다. 다른 지역에서는 전날 상엿집에서 상여를 가지고 와서 호상(好喪)일 경우 대도듬[상여가 나가기 전날 빈 상여를 메고 소리 연습을 하는 풍습]을 하는데, 여기에서는 그런 것은 없었다고 한다. 전에는 상엿집이 마을 오른쪽 산 너머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져 마을회관에 상여를 보관한다. 관을 방에서 낼 때는 방문 앞에 바가지를 엎어 놓고 깨고 나오는데, 잡귀가 달아나라고 하기 위해서이다. 관을 밖으로 내어 상여에 올려놓은 후 발인제(發靷祭)를 지낸다. 이때는 축문을 읽는다.
상여는 양쪽에서 12명이 메는데, 상여를 멘 후 상두꾼들은 상갓집을 보고 반절을 하고 묘지를 향해 간다. 대열의 순서는 명정(銘旌)[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적은 기]과 가주를 모신 교의(交椅)가 먼저 가고, 만장(輓章)이 상여의 앞이나 뒤를 따르고, 그다음 상여가 가고 그 뒤에 상주들이 따라간다. 여기서 다른 지역과 다른 특징은 여상주들도 장지까지 간다고 한다. 또한 상여 앞에는 선소리꾼이 방울을 들고 선소리를 메기고 다른 사람은 꽹가리나 북을 들고 장단을 쳐 준다. 재산이 많은 집안에서는 호상이 나면 삼현육각(三絃六角)[피리 2, 대금 1, 해금 1, 장구 1, 북1]을 다하는 집도 있었다고 한다. 산에는 산일하는 사람들이 미리 도착하여 산을 파기 전에 토지신에게 제를 올린다. 옛날에는 학자들이 축문도 읽고 제대로 했으나 이제는 절도 안 하며 간단히 술만 올린다고 한다. 산신제는 평토제(平土祭)[하관(下棺)을 마치고 봉분을 만든 후에 묘 앞에 제물을 진설(陳設)하여 지내는 제사]를 지내기 직전에 회다지[흙에 회를 섞어 다지는 일]를 끝낸 후 묘 위쪽에 올라가 산신축(山神祝)을 읽고 지낸다.
장지에 상여가 도착하면 묘지 옆에 영좌를 마련하고 관을 안치한 후 하관할 시간이 되면[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 하관을 보지 못하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이때 묘지에 오지 못함.] 관을 하관한다. 이때 시신만 넣는 집안도 있으나 이영규 집안에서는 관을 다 넣는다고 한다. 관을 넣은 후 관 위에 영정을 덮고 그 위에 홍대[나무토막]를 5~7개 정도 넣는다. 이때 홍대 세 번째[망자의 가슴 위치] 것을 들어내고 예단(禮緞)[좌에는 청실, 우에는 홍실]을 넣는다. 상주가 삽으로 관의 네 귀퉁이에 한 삽씩 회를 넣고 흙을 넣고 묘를 다진다. 보통 회다지는 3번을 밟는데 호상일 경우는 5번 혹은 7번 밟는 경우도 있다. 회다지꾼들은 막대기를 하나씩 들고 가슴을 맞대었다가 등을 돌렸다가 하면서 지휘자의 신호에 맞추어 신명나게 회다지를 한다. 회다지를 한 후 묘봉이 다 만들어진 후 평토제를 지낸다.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에 초우제(初虞祭)를 지내고, 이튿날 오전에 재우제(再虞祭)를 지내고, 삼일째 삼우제(三虞祭)를 지낸다. 돌아가신 지 100일째 되는 날 졸곡제(卒哭祭)를 지내고, 1년이 되면 소상(小祥), 2년이 되면 대상(大祥)을 지내고 대상 후 상청(喪廳)을 없애고 상복을 벗는다. 대상 후 100일째 되는 날 담사(禫祀)[3년의 상기(喪期)가 끝난 뒤 상주가 평상으로 되돌아감을 고하는 제례]를 지낸다. 그 후 1년마다 기제(忌祭)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