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5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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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殷植 |
영어공식명칭 | Kang Eunsik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병권 |
[정의]
경기도 시흥 지역이 속해 있던 옛 시흥군 군자면의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개설]
강은식(姜殷植)[1885~?]은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원곡리[지금의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출신으로 1919년 4월 4일 군자면 3.1운동을 주도하고 일제로부터 피체(被逮)되어 옥고를 치렀다.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활동 사항]
강은식은 시흥군 군자면 원곡리 출신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군자면에서는 4월 3일 “거모경찰관주재소 및 군자면사무소를 불질러 부숴버리자.”라는 격문이 각 동·리에 배포되었다. 이 첩지를 하루 전 입수한 일본 경찰이 영등포로부터 순사 6명, 헌병 7명을 무장시켜 파견하고 있었다.
4월 4일 오전 11시경 약 천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 군자면 거모리의 면사무소와 주재소 부근[지금의 도일시장 인근]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강은식은 손병희(孫秉熙) 등의 조선 독립 선언 취지에 찬동하여 정치 변혁의 목적으로 수백 명의 군중 속에 참가하여 주변 사람에게 얻은 구한국(舊韓國) 국기를 흔들며 군중을 격려하여 함께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날 김천복(金千福)도 죽율리 주민들에게 “독립 만세를 부르기 위해 면사무소로 가라. 만약 불응하는 때에는 후환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주민 30명을 구장 집에 모이게 한 다음 함께 거모리로 출발하였다. 이때 시위 군중이 일본 경찰의 총소리를 듣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김천복은 다른 주동자 2~3명과 함께 거모리에 이르러 면사무소 및 주재소 부근에 집결한 수백 명의 군중과 합세, 선동하여 조선 독립 만세를 불렀다. 격렬한 기세로 주민들이 달려들자 일본 경찰이 총을 쏘아 이를 해산하였다. 강은식은 김천복과 주모자로 체포되어 함께 기소되었다.
강은식과 김천복은 1919년 5월 2일 경성지방법원 조선총독부 판사 아리사와 사쿠치[有澤作治]에 의해 보안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1년에 처해졌다. 이후 항소하여 6월 19일 경성복심법원 판사 제4부 이토 준키치[伊東淳吉]가 기각하고 재차 상고하여 7월 31일 고등법원 형사부 재판장 이시카와 마사시[石川正]가 이를 기각, 형이 확정되면서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시흥시는 2015년 96주년 3·1절을 맞아 군자동 3·1절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가 ‘시흥시 삼일독립운동 기념비’를 군자초등학교 운동장에 세우고 시흥문화원과 매년 시흥 지역의 3.1운동을 기려 기념식과 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