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3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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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浦里號拉致越北未遂事件 |
영어공식명칭 | The North a Case of Attempted Kidnapping Poriho |
이칭/별칭 | 포리호 사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주혁 |
[정의]
경기도 부천군 소래면 포리[지금의 시흥시 포동] 어업의 상징이었던 포리호가 1960년 12월 납북될 뻔했다가 수장되었던 사건.
[역사적 배경]
일제강점기 시절과 달리 남북 정부 수립 이후 삼팔선(三八線)이 생기면서 남한 주민은 이북의 주요 어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런 난관을 극복하고자 보다 발전된 장비를 갖추고 선박이 소형에서 중형화되는 추세가 이어졌다.
포리호(浦里號)는 주민 원용선이 은행 융자로 자금을 마련하고 3개월에 걸친 진수(進水) 과정을 통해 탄생하였다. 포리호는 신식 어선으로서 돛대가 2개 달렸으며, 길이는 60자[약 20m] 규모로 부천군 소래면 포리의 선박 중에서는 가장 컸다. 이후 포리호는 서해와 남부의 먼바다로 나가 주로 조기잡이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휴전 이후 분단이 지속되고 대결 의식이 높아지는 가운데 크고 작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과]
1960년 12월 16일 밤 김사배(金四培) 일당이 목포에서 제주행 경주호를 타고 가다가 배에 있던 군인을 죽이고 선장을 위협해서 기수를 북으로 돌렸다. 경주호 선장은 북으로 가는 척하면서 일부러 기관 고장을 일으켜 표류하게 되었다. 마침 제주도로 조기잡이에 나섰던 포리호가 그 옆을 지나가다가 납치되어 김사배 일당이 포리호에 옮겨 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포리호도 그만 고장이 나고 말았다. 그러자 지나가던 일본 어선으로 전부 옮겨 탔고, 일본인 선장은 일당을 태우고 일본으로 향하였다. 일본인 선장은 12월 18일 연락을 받고 출동한 해군 81함[경남함]을 만나 이들 납치범들을 넘겨 주었고, 12월 19일 경찰에 인계되었다. 포리호는 파도에 휩쓸려 목포 앞바다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결과]
포리호의 출발과 마지막은 이 땅의 비극인 분단 문제와 직결된다. 이 사건에 관련된 인사는 매우 많았고, 경주호에서 포리호로 이어지는 납치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여기에 포리호가 ‘조기에 울고 웃는’ 마을의 경제 사정을 좌우할 정도로 비중이 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포리호의 진수식 때에는 주민들 모두가 큰 잔치를 벌일 정도로 경제적 희망을 담은 상징물과도 같았다. 그만큼 이 사건은 한 마을의 흥망성쇠를 결정한 비운의 열쇠로 작용한 셈이었다.
[의의와 평가]
이 사건은 당시 중앙 일간지 1면 머리기사에 여러 차례 상세히 보도되었고, 신문 사설 제목으로까지 등장할 정도로 정치적·사회적 파장이 컸다. 포리호 침몰이 가져다준 어업 기반의 상실은 더욱 치명적이었다. 배가 침몰되는 사건이 발생했는 데도 국가의 보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선주는 물론 동네 사람들에게도 타격이 심했다.
사건 이전 포리호는 2년 정도 이어진 조기잡이를 통해 마을의 경제 형편을 좌우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마을 어업의 상징이었던 포리호가 뜻하지 않은 납치극으로 비극을 맞이하였고, 그 결과 주민들의 땀과 애환도 포리호와 함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포리의 중심 마을인 새우개 토박이들은 당시 이 사건이 마을 경제에 치명타를 가했다고 모두 한목소리로 증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