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372 |
---|---|
한자 | 水仁線敷設工事 |
영어공식명칭 | Suin Line Construction Work |
이칭/별칭 | 수인선,협궤열차,경동철도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훈도 |
[정의]
경기도 시흥 지역을 통과하는 수원~인천 간 수인선 협궤열차 부설을 위해 1936년 6월부터 1937년 7월까지 1년여 동안 진행된 공사.
[개설]
수인선(水仁線)은 1937년부터 1995년까지 58년간 수원~인천 간을 운행하던 협궤철도이다. 수인선은 1935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허가를 받아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朝鮮京東鐵道株式會社)가 부설하였다. 수인선 시흥 구간은 해안 간석지에 철로를 놓는 일이어서 난공사였다. 소래철교를 놓을 때 주민 반대 등 어려움이 많았다. 소래역 개통으로 시흥 지역에는 군자역과 달월역이 생겼다. 수인선은 시흥의 여객과 화물 운송의 주요 교통수단 구실을 하였다.
[역사적 배경]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는 수인선에 앞서 1930년 수원~여주 간 수여선(水驪線)을 부설하였다. 수여선은 애초의 우려와는 달리 경기도 내륙 곡창지대와 수원을 지나가는 경부선을 연결함으로써 여객과 화물 수송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수여선의 수익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자 수인선을 부설해야 한다는 논의도 커졌다. 조선총독부는 내륙 수송을 위해 철도를 건설해야 한다는 인천과 수원 지역 상공인들의 여론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1935년 수인선 부설을 허가하였다.
[경과]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는 1935년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았지만 철도 부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주민들과 갈등을 겪었다.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는 토지 수용권을 내세워 토지를 헐값에 매입하려고 했고, 주민들은 이에 반발하였기 때문이다.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는 수인선 부설 자금 마련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이듬해인 1936년 6월에야 수인선 부설 공사에 착수할 수 있었다.
수인선은 지반이 연약한 갯벌 지대를 지나도록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난공사 구간이 많았다. 소래철교가 놓이면 어선이 지나가기 어려워진다는 이유로 어민들의 반대도 컸다. 그러나 토지 수용 문제가 점차 진전을 보이면서 1937년 2월에는 17개 역 내정지가 발표되는 등 수인선 부설 공사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결과]
수인선은 1년여의 공사 끝에 1937년 7월 개통식을 갖고, 1937년 8월 6일부터 정식 운행에 들어갔다. 총연장은 52㎞였고, 영업 구간은 46.9㎞였다. 역은 정차장 10개, 임시 정류장 7개였다. 정차장은 역사와 역무원이 배치된 역이고, 임시 정류장은 역사도 역무원도 없이 기차가 서는 정거장이었다.
시흥 지역에 있었던 수인선 역은 군자역과 달월역 두 곳이다. 지금의 시흥시 정왕동에 위치한 군자역은 1937년 개통 때 역사가 건립된 정차장이었다. 군자역 역사는 일제강점기 말 개축되었다가 1988년 역사를 철거한데 이어 1994년 폐지되었다. 지금의 시흥시 월곶동에 있던 달월역은 간이 정류장이었다.
수인선은 개통 이래 시흥과 인접 지역의 인적·물적 교류에 크게 기여하였다. 수인선 시흥 구간은 1995년 완전 폐선될 때까지 군자염전과 소래염전의 소금은 물론 시흥 지역 농민들이 재배한 농작물을 인천과 수원으로 운송하여 판매하는 주요 교통수단이자 시흥 지역 학생들의 통학 수단이었다. 협궤철도인 수인선을 광궤화하자는 여론이 1940년 무렵부터 높아졌으나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의 발발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수인선은 인천항과 경기도 내륙 지방을 거쳐 강원도까지 연결할 수 있는 철도망의 한 축이었다. 수인선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을 돕는 철도로 구상되고 부설되었으나, 부설 이후 물류와 여객 운송을 통해 시흥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 유용한 역할을 한 운송 수단이었다.